올해 2023년 추석은 임시공휴일까지 끼여서 6일이나 되는 긴 연휴였다. 싱글이던 시절에는 이런 연휴가 짧은 방학을 맞은 것처럼 반가웠는데 지금의 나에겐 연휴가 길어질수록 몸이 늘어지고 일상으로 돌아가기까지 시간이 더 걸리는 것 같아 예전만큼 반갑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연휴 동안 집냉장고에 있는 음식들을 소비하기 바빴는데 오늘은 나 홀로 집에 있자니 냉장고 쪽으로 손이 가질 않았다. 자연스레 나의 손길이 간 곳은 비상식량을 비축해 두는 서랍장.. 간단히 데워 먹을 수 있는 카레와 고소한 캔참치, 그리고 소울 푸드인 라면이 나의 시선을 어김없이 끌어당긴다. 라면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동시에 어떤 라면을 먹을지 잠시 고민에 빠진다. 나의 선택은 너구리(라면의 종류)이다. 너구리는 일반 라면보다 면발이 좀 더 굵고 다시마(물론 1장이지만)가 들어있어 특유의 고유한 맛이 있다.
내가 중학교를 다녔을 때 친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셔서 몇 년을 함께 살았다. 엄마가 외출을 하고 집에 없을 때 할머니는 나에게 자주 너구리를 끓여주셨다. 당시 엄마는 집에서 라면을 거의 못 먹게 했었는데 그래서인지 할머니가 끓여주시는 라면은 집에서 소박한 일탈을 가능하게 하는 탈출구였고 그런 라면을 끓여주시는 할머니는 엄마의 잔소리를 막아주는 나의 든든한 백그라운드였다. 내가 결혼을 하고 마트에서 장을 보면서 라면코너에 가면 나도 모르게 너구리를 가장 먼저 카트에 담게 된다. 거의 모든 음식에 소금 간을 하듯이 내 의식 속에 라면이라 하면 너구리지.라는 생각이 박혀있는 것 같다. 왜일까..... 내가 어렸을 적 할머니와 함께 먹었던 그 시절의 시간을 기억하기 위함일까 아니면 그때 먹었던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일까 아니면 둘 다 일까... 내가 먹는 건 라면이었지만 내가 느끼고 싶은 건 아마도 그 시절의 추억이 아닐까 싶다.
그 시절 우리 집은 아파트 3층에 살았고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3층까지 걸어서 올라갔는데 내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갈 시간 즈음이 되면 할머니는 매번 현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고 할머니의 손에는 항상 들려있는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요. 쿠. 르. 트. 내가 아파트의 계단을 걸어 올라갈 때쯤부터였을까 아니면 현관문을 열쇠로 여는 소리가 들릴 때쯤이었을까... 할머니는 요구르트의 가장 윗부분에 붙어 있는 초록색의 호일같은 것을 떼어내고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신발을 채 벗기도 전에 해야 하는 것은 할머니께 "다녀왔습니다"라는 인사를 하고 할머니가 건네주시는 요구르트를 받아 마셔야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내가 아침에 일어나 욕실에 들어가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과정이었다. 요즘 길을 걷거나 차를 운전해서 다니다 보면 길에서 요구르트를 파는 아주머니를 볼 수 있다. 할머니가 주시던 그 요구르트는 마트에서는 팔지 않아 어디서든 그 아주머니가 보일 때는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운전을 할 때는 근처 주차가 가능한 곳에 차를 세우고 요구르트를 사서 집에 오곤 한다. 나의 하굣길을 반겨주었던 할머니의 얼굴만큼이나 매일 같은 시간에 마셨던 그 요구르트는 나를 그때 그 시간으로 데려가 주는 동시에 마시는 몇 초의 짧은 시간 동안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학교를 가지 않는 일요일이면 할머니랑 둘이서 대중목욕탕도 자주 갔었다. 나는 목욕탕에 가는 건 좋아했지만 열탕에 들어가는 건 내 인내심의 한계를 마주하는 것 같아서 달갑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머니와 목욕탕에 가는 걸 좋아했던 이유는 나는 따뜻한 열기가 있는 곳에 들어가 있는 걸 좋아했고 또 한 가지는 할머니는 항상 단지 모양의 바나나맛 우유를 사주셨다. 그때만 해도 바나나 우유는 늘 먹는 우유였다기 보다는 뭔가 특별하거나 기분을 낼 때 마셨던 기억이 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무언가를 먹으면 더 꿀맛이었던 것처럼 목욕탕에서 마시는 바나나맛 우유는 가뭄에 단비 같았다. 숨이 턱 막히는 열탕에 반쯤 몸을 넣고서 시원하고 달달한 맛의 우유를 쪽쪽 빨아먹으며 멍 때리는 것이 그때 나의 소중한 힐링 시간이었다. 그 뒤로 내가 성인이 되어 혼자 목욕탕엘 가게 되는 날이면 나는 단지 모양의 바나나맛 우유를 사서 마시곤 한다. 얇은 빨대를 꽂아 쪽쪽 빨아 마시며 멍을 때리면서...
어렸을 때는 몰랐다. 나는 내가 그저 스스로 성장한 줄 알았지만 할머니가 끓여주시는 너구리(라면)를 먹고, 할머니가 주시는 요구르트를 마시고, 할머니가 사주시는 바나나맛 우유를 마시는 것이 그때 그 시절 나의 마음을 통통하게 했던 할머니의 관심과 사랑, 보살핌이었다는 걸.... 이유 없이 마음이 허한 날이면 너구리를 끓여 먹고 요구르트를 단번에 홀짝거리고 바나나맛 우유를 마신다. 그렇게 할머니와의 추억이 깃든 것들이 아직도 여전히 나의 숨통을 트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