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 시댁의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발인날 교회 묘지에 한 줌의 재가 되어 묻히는 모습을 보며 10년 전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가 생각났다.
새벽 1시. 남편의 휴대폰이 울린다. 엄마에게서 온 전화였다. 그 시각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올리가 없는데 와락 겁이 났다. 엄마의 전화를 받고 달려간 곳은 병원 영안실 한켠..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울음을 터트린 나를 보는 남편은 엑셀을 더 세게 밟아 속력을 내는 거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영안실 입구에 들어서자 저쪽 한편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뒷모습마저 애처로웠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엄마는 고개를 돌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걸어오는 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엄마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뛰는 듯 빠른 걸음으로 엄마 쪽으로 걷던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울음소리는 갈수록 더 커졌고 엄마의 어깨가 들썩였고 엄마의 눈물이 내 어깨를 타고 흘렀다. 그럴수록 나는 내 눈물을 보이기 싫은 거 마냥 엄마를 더 힘껏 끌어안았다.
엄마와 내가 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 남편은 병원에서 장례식에 필요한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상복은 무슨 색으로 입을 건지. 며칠장으로 할 건지. 상조회사에는 연락했는지. 고인의 입관은 언제 할 건지 등등의 일들이었다.
엄마랑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둘 다 장례식장의 방한켠에서 상복을 갈아입고 있었다. 오만 지역전문가로 가있던 남동생에게는 시차 때문에 바로 연락을 할 수가 없어 회사 본사로 연락을 했었다. 그것도 남편의 일이 되었다.
한국으로 오는 비행 편이 바로 없어 이틀 만에 장례식장에 도착한 동생은 아빠의 영정 사진 앞에서 소리 내어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다. 커다란 덩치의 동생이 엎드려 울자 엄마와 나 또한 눈물이 마르지 않고 흘러내렸다.
이틀을 제대로 못 자고 못 먹고 운 것밖에 한 것이 없었을 때쯤... 배가 고파왔다... 조문객들에게 내어주는 쇠고깃국을 한 술 뜨고 몇 숟가락을 더 입으로 가져갔을 때 입안에 가득 찬 국물만큼이나 나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빠가 돌아가셨지만 나는 배가 고파 이렇게 밥을 먹고 있구나 싶었다. 나는 살아야겠기에 꾸역꾸역 먹으면서도 죄책감 아닌 죄책감 같은 것을 느꼈다.
발인날이 되어 화장터로 갔을 때, 그곳은 같은 슬픔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화장되어 나온 아빠는 그저 한 줌의 재가 되어 하얀 종이에 쌓여 돌아왔다. 방금 한 시간 전까지 온전한 몸의 형태로 있던 아빠는 흙에서 왔듯 흙으로 돌아갔다. 아빠가 담겨 있는 유골함을 보니 인생의 무상함이 절로 느껴졌다. 4일장을 치르고 성당 묘지로 아빠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온 나머지 가족들...
우리는 모두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씻고 옷을 갈아입고 밥을 먹었다.. 그리고는 아빠의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빠의 지갑, 지갑 안의 딸아이의 사진만 빼고 나머지 물건들은 모두 버리자고 했다. 곁에 두면 너무 생각나서 더 힘들 것 같다고... 엄마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남동생은 보름간의 휴가를 끝으로 다시 오만으로 떠나야 했고 엄마는 집에 혼자 남겨지게 되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석 달 동안 나는 딸아이가 금요일 유치원에서 하원하면 바로 엄마집으로 가서 일요일 저녁에 집으로 다시 돌아오고 했었다.
엄마는 말없이 소파에 앉아 흐르는 눈물을 닦는 일이 잦았고 티브이를 보면서도 울고 있었다. 엄마는 석 달 동안 매일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가셨고 검정 옷만 입고 다니셨다. 나는 집에 혼자 있을 때면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늘었고 이유 없이 눈물이 났다. 타국에서 혼자 슬픔을 감내해야 했던 동생은 아빠랑 함께 봤던 영화들을 다시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가족 모두가 아빠의 부재를 인정하기 힘들었고 인정하기 힘들어서 더 아팠고 그렇게 아파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애도의 시간을 보냈다.
그 뒤로도 생각지 못했던 일상의 순간순간에 아빠는 불현듯 내 맘에 찾아와 눈물을 안겼고 스치는 바람처럼 기척도 없이 다시 사라지며 그리움의 감정을 차오르게 했다. 가슴에 총을 맞으면 그런 기분일까.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뻥하고 가슴 중앙이 뚫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면 가슴이 저릿해지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내 맘의 울렁이는 파도가 잔잔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밖에...
처음부터 그런 맘이 든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 30대고 아직은 아빠의 그늘이 필요한데.. 아빠 없는 딸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이 들었고 화도 났다. 그렇게 현실을 거부하고 싶었고 분노의 맘이 일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난 후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그 슬픔의 크기가 작아진다거나 고통의 깊이가 얕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아빠의 부재를 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그 슬픔에 갇히지 않고 살아남아 있는 자로서 내 자리에서 나의 인생을 살아가야 했다.
여러 해에 걸쳐 아빠의 부재를 몸으로 느끼고 맘으로 깨달으면서 나는 한 가지 얻은 것이 있었다. 나와 같은 슬픔을 겪은 이의 마음, 가장 가까운 가족을 떠나보낸 이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인간은 누구나 내가 직접 피부로 겪어보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아무리 많은 영화와 드라마로 그런 상황을 보고 슬픔을 느꼈더라고 그것은 한낱 남의 일이다. 그러나 나의 문제가 되면 체감의 온도가 달라진다. 그저 남의 일이 아닌 것이 된다.
아빠를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지만 그런 사실로 인해 타인의 마음과 타인의 입장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짧은 위로의 말보다 내 두 팔을 벌려 가만히 안아주고 싶다. 두 손을 맞잡아 주고 싶다. 곁에서 그 상실의 마음을 알아주고 싶다. 삶은 겪은 만큼 알고 아는 만큼 보이는 것 같다. 울고 있지 않아도 그 너머의 슬픔과 그 안의 서글픔까지도 조심스레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하나를 잃으면 그만큼의 하나를 다시 얻게 된다.
삶은 지독하리만큼 공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