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올해 장마는 유난히도 길었어요. 여러 날 동안 비가 오다 말다를 반복했고 비가 오지 않은 날도 습도가 높아 꽤나 몸이 지치게 만들더라고요. 중복을 이틀 남겨놓은 오늘 아주 오랜만에 쨍하게 얼굴을 드러낸 해를 보았어요. 어찌나 반갑던지 아침부터 기분이 절로 좋아지던걸요. 그런데 반전은 아직도 장마가 끝나지 않았다는 뉴스기사를 접했다는 건데요. 비 오는 거 싫어하는 딸은 장마가 영~~ 반갑지 않네요.
아빠가 계시는 그곳은 어때요? 그곳도 장마라는 게 있나요? 가보지 못한 곳이라 알 수는 없지만 궁금하네요. 그곳으로 가신분들은 말이 없어 어쩜 더 궁금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어제까지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이 비를 뿌리더니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매미들이 쉴 새 없이 울어대고 있어요. 너무 시끄럽다고 느낄 때쯤 아... 이렇게 폭염이 시작되는 거겠구나 싶어요. 벌써 7월의 마지막주를 향해 시간이 흐르고 있는데 저는 한 달 뒤쯤 이사를 하게 되었어요. 아빠가 돌아가시고 이번이 두 번째로 하는 이사가 되겠네요. 원래는 10월 말쯤 할 것 같았는데 어째 일이 빨리 진행되어 보금자리를 옮기게 되었고요. 새로 이사 가는 곳은 입주하기 전에 올수리를 하고 들어가야 할 것 같아 6주 정도 어머님집에 들어가서 생활해야 할 것 같아요. 이번에 어머님집에 들어가서 한달 넘게 살게 되면 긴 시간동안 그렇게 같이 지내는건 아마도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사람일은 알 수 없지만... 예전에 함께 살 때랑은 또 다른 느낌일 것도 같아요.. 어머님 건강은 예전보단 못하시지만 그래도 여전히 반찬을 만들고 김치를 담가서 주변사람들에게 퍼주고 계셔요. 그게 어머님의 행복이니깐요.
이사를 간다고 생각하니 저를 둘러싼 이곳의 환경들이 그리울 거 같기도 해요. 콩이를 데리고 걸었던 아파트 로비 산책길. 산책길 끝에 자리한 빨간 공중전화부스도 생각날 거 같아요. 서윤이랑 함께 집 근처 박물관까지 걸어갔다가 문구점에 들러 필요하지도 않은 볼펜등을 사고 돌아오는 길에 스타 벅스에 가서 시원한 커피도 한잔씩 마시고 오고 그랬는데 그런 모든 일들이 이제 추억으로 남겠네요. 아! 참! 아빠. 저 강아지 키우고 있어요! 강아지 그렇게도 무서워하고 싫어했는데 역시나 사람일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나 봐요. 두 오 씨 부녀의 성화에 못 이겨 데리고 왔는데 지금은 식구들 중 제가 제일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가 되었어요. 아빠가 계셨다면 우리 콩이를 보고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요.. 귀여운 녀석이라고 하셨겠죠? 안 보면 눈에 삼삼하다 하시고...
아빠 지갑에 꽂혀있던 바가지 레고 머리를 한 증명사진의 손녀는 이제 어엿한 중학생이 되었어요. 너무 어엿하다 못해 제멋대로이기도 하지만 겁 많고 은근 소심한 건 여전해요. 그 또래 소녀들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재잘거리는 걸 좋아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깔깔깔 즐거워하며 떡볶이와 마라탕을 주기적으로 먹어줘야 하는 아이가 되었어요. 오늘 여름방학식을 하고 왔는데 친구랑 영화를 보러 간다더군요. 책가방은 내동댕이 치고 배꼽이 드러나는 크롭티에 찢어진 짧은 청반바지를 입고 화장을 곱게 하고 나갔어요. 지금의 서윤이를 보면 깜짝 놀라실 텐데.. 너무 컸어요. 몸도 마음도 모두 다. 아주아주 꼬맹이 시절 조용히 주위를 관망하고 말수가 적던 그 손녀는 지금 없습니다. 그런데 집에 들어오겠다고 약속한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소식이 없네요.. 저도 엄마가 처음이라 요즘 서윤이를 키우면서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고 있어요. 아이 때문에 상처받기도 아이 때문에 힘들기도 하면서요. 엄마, 아빠도 저 키울 때 많이 힘드셨을까? 그런 생각을 이제야 해봅니다.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내 부모의 마음이 보이는 거 같아요. 그러니 인간은 나서 죽을 때까지 깨우치는 존재인 거 같아요. 어떤 것도 그저 되는 게 없고 알고 있다고 해서 계획한 대로 되는 법도 없더라고요. 제 앞에 주어진 일들을 조금이라도 현명하게 대처하는 지혜가 필요할 뿐인 거 같아요.
엄마는 잘 지내고 계세요. 여전히 사무실 사람들과 일상을 나누고 성당의 봉사활동에 열심히 시구요. 가까운 지인분들과 음악회나 공연 등을 자주 보러 다니세요. 매일마다 하는 새벽기도는 빼먹는 법이 없는데 엄마 자신을 위한 기도가 하나도 없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어요. 그저 아들, 딸, 사위, 손녀, 손자, 아픈 지인들을 위한 기도예요. 엄마는 요즘 회사 사람들과 함께 헬스를 다니시는데 살이 조금 빠지셨고 몸이 한결 가볍다 하시네요. 아빠가 계시지 않아도 하루의 많은 부분을 함께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한 일입니다.
설인이는 지금 사우디에 가있어요. 인터페이스직으로 갔는데 세계 12 국가가 함께 프로젝트에 참여하는데 일이 여간 많은 게 아니라네요. 너무 당연하겠죠. 며칠 전에는 프로젝트 함께 하는 다른 나라 책임자들과 발주처를 상대로 미팅이 있었대요. 미팅에서 설인이가 삼성 대표로 발표를 했는데 한국인이 그런 발표를 하는 건 최초라고 했다네요. 무척이나 보람되고 가슴 벅찼을 거 같아요. 설인이가 엄마의 자부가 되어 너무 다행이고 또 그렇게 자신의 길을 차근히 밟아 가는 것을 보는 것 또한 자랑스럽네요. 국위 선양이 뭐 별건가요. 그 정도면 차고 넘치죠. 아빠가 계셨다면 세상 흐뭇해하실 것 같은데 아마도 누가 보지 않아도, 누가 물어보지 않아도 아빠 어깨랑 목에 힘이 들어갔겠죠? 그림이 그려지네요..
오빠는 작년에 뇌동맥류가 발견되어서 병원에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고 있어요. 금연을 무조건 해야 한다고 하는데 아직도 완전히 끊지 못하고 있는 거 보니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해요. 자주 욱하는데 은근히 독하질 못해요. 아빠도 아시죠? 아빠 닮았나? 아들도 아닌 사윈데?하하하. 다른 것보다 건강이 우선인데 자신의 건강을 좀 더 챙겼으면 좋겠는 마음이에요. 아빠가 꿈에 나타나 한번쯤 호통을 쳐 주세요. 본인 건강은 물론이고 처자식 생각도 하라구요.
담달이면 아빠가 돌아가신 지 벌써 10년이에요. 시간이 이리도 빨라요. 서윤이가 그해 5살이었는데 이제 15살이 되었으니까요. 여름이 다가오면 아빠 생각이 자주 나고 아빠 기일이 있는 8월이면 엄마가 은근 울적해지시는 것 같아 걱정이 앞서네요. 아빠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엄마랑 설인이가 꿈에서 아빠를 봤다고 얘기했을 때 내 꿈엔 한 번도 찾아오시지 않아 은근 그곳에 계신 아빠한테 섭섭함이 생겼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게 참.. 못났었죠. 그게 뭐가 그리중요하다고..
이제는 살아남아있는 자의 역할을 어렴풋이 하나씩 알아가는 것 같아요. 지금 있는 이곳에서 나의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게 살아있는 자의 몫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8월이면 너무 자주 나타나 심란하게 하지는 말되 너무 천천히 나타나 섭섭하지 않도록 엄마한테 다녀가 주세요. 아빠도 엄마가 제일 그리우시죠?
작년에 그곳으로 가신 고모부랑은 만나셨죠? 그동안 서로 못다 한 얘기도 나누시고 두 분 좋아하시는 바둑도 오래오래 즐기셔요. 8월의 마지막날 아빠가 제일 좋아하시던 포도가 올려진 상차림으로 찾아뵐게요.
너무 늦게 근황을 전해드려 죄송한 마음이에요.
아빠는 이제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다는 걸 알아요.
아빠가 많이 그리울 때는 푸르른 하늘을 천천히 오래도록 올려다볼게요.
그곳에서 지금처럼 그렇게 편히 바라봐주세요.
- 2023.7.19. 수요일. 사랑하는 은딸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