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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두나무 Jan 19. 2024

나의 만년필 (박완서)

여자의 삶, 엄마의 삶, 작가의 삶


내가 살면서 나에게 훌륭한 스승은 누가 있었나 생각해봤다.  초. 중. 고등학교 때의 선생님? 대학교 때의 교수님? 직장 생활할 때의 동료나 선배들? 글쎄... 그들 중 누구도 내게 훌륭한 스승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여러 사람에게 존경받는다고 해서 나에게도 훌륭한 스승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시어머님과 함께 11년을 살았는데 그때는 몰랐다.그 시간 동안 내가 무엇을 얼마나 배우고 느끼고 깨닫게 되었는지...

분가해서 따로 나의 살림을 살게 되면서,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서, 어디에서든 어르신들을 뵈면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깨닫는다.

아... 내가 어머님과 살면서 이런 걸 나도 모르게 몸으로체득하고 있었구나라고.


처음은 함께 사는 것이 당연히 힘들었다. 왜 아닐까. 나의 배우자인 남편의 맘도 다 알지 못해 섭섭해하고 어떤 날은 그 맘을 다 알고 싶지 않은 날도 많아 그렇게 여러 해를 싸우고 미워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기를 반복했는데.. 그의 어머니가 나에게 더 어려운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나와 모든 것이 다른 어른과 산다는 것은 나에게 또 다른 문이 하나 열리는 것이었다. 어머님과 함께 살면서 꾸지람 아닌 꾸지람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당시엔 가슴이 얼마나 벌렁거리던지.. 그건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기 전에 설레서 벌렁거리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상사에게 꾸지람을 듣는 것과도 달랐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내 방으로 돌아와 침대 귀퉁이에 앉아 한참을 생각해 봤다.


내가 꾸지람을 들은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지만 나의 생각이 짧았던 건 사실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어머님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주변 상황을 살필 줄 알고 그 상황에서 내가 상대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를 알아가게 되었다.


어떤 경우는 나는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나의 행동이나 말로 어머님이 섭섭해하셨다면 그건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머님께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내가 어머님과 함께 살면서 내 맘에 새긴 건 딱 한 가지.웃어른에 대한 순종이었다. 순종을 한다고 해서 내가 없어지는 게 아니었다. 나의 자존심이 상할일도 없다는 것을 나는 어머님과 함께 산지 3년을 넘어가면서 깨달았다.


그랬더니 함께 하는 공간, 시간이 나에게 다르게 다가왔다. 어머님이 하시는 요리, 어머님보다 연세가 더 많으신 분을 대하는 태도, 더 줄 것이 없나 항상 내 것을 살피는 마음, 타인과 있을 때 분위기를 풀어주는 유쾌함까지 보고 배울 것들은 차고 넘쳤다. 다만 내가 내 맘을 닫고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책에서 읽고 배운 것보다 더 확실하고 직접적인 가르침이었고 이렇게 하라고 일러주신 적은 없지만 그렇게 살아가시는 것을 옆에서 직접 보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배움이었다.


어쩌면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건 책 속의 지식보다 삶 속에서 피어나는 지혜라는 걸 시집살이 11년을 통해 깨달았다. 내가 시어머님과 11년을 같이 살았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얘기한다.

"11년이요?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사실 수 있었어요? 너무 힘들지 않으셨어요?"


지금의 나는 웃으며 그 시간을 얘기할 수 있다. 물론 힘들었다. 속상해서 혼자 운 적도 많았다. 하지만 늘 그런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힘들고 속상한 게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살면서 어떤 사람을 만나든 어떤 일을 하든 누구나 그런 과정을 겪지 않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좋고 처음부터 끝까지 쉬운 게 어디 있을까..


어머님과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나는 누구보다 어른과함께하는 법을 잘 익힐 수 있었다.


타인에게 당신도 한번 같이 살아보세요. 별거 아니에요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그 시간을 통해 좀 더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 모든 시간이 내 인생에 있어서 소중한 이유이다.









작가 박완서 님의 '나의 만년필'은 한 시대의 여자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여자의 삶에서 엄마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강한 어조로 얘기하신다. 아이를 키우고 육아를 하는 것, 집에서 전업주부로 사는 것의 가치를 강조하면서도 나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이신다.


흔히 말하는 '효'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님을, 3대가 함께 사는 것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신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나는 너무 알 것만 같다. 어머님과 함께 산 시간을 돌이켜보면 나뿐만 아니라 나의 딸아이에게도 그 시간은 소중하고 추억의 한 자락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것이 아이의 가슴속에 담겨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로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부분에서 나는 앞으로 어떤 맘으로 글을 써 내려가야 하는 건지 마음을 다잡게 되기도 했다. 내가 나로 살기 위해, 내가 그녀와 같은 여자로 당당하게 살기 위해 뻗으면 닿을만한 가까운 곳에 항상 이 책을 두고 잊힐만하면 한 번씩 봐야 할 것만 같다. 나의 할머니가 내게 삶의 이치를 얘기해 주시면 그게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조금씩 알고 가고 있기 때문이다.




(p137) 아내가 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자기 성장을 멈춰버릴 게 아니라 자기가 받은 교육을 바탕으로 지적인 탐구를 계속하고 능력을 개발하는 일을 게을리 말아 자기 능력에 맞는 일을 발견할 일이다. 능력과 정력을 바칠 일을 가짐으로써 아내는 비로소 자유로워질 것이다. 능력과 줏대 없는 자에게 주어진 자유는 말짱 헛거다. 환상이다.



(p151) 부모님을 모신다는 일이 그렇게 쉽기만 한 문제는 아니다. 조심스러운 데, 삼가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 줄 안다. 그러나 가정이란 어차피 그런 게 아닐까. 결혼을 한다는 건 얽매임에 드는 일이요, 가정이란 상호 억제를 바탕으로 인화의 기술을 배우는 곳이요, 그래서원만한 가정을 가졌다는 건 원만하고 풍부한 사람 됨됨이를 의미하게 되는 게 아닐는지.



(p168) 글 쓰는 어려움에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으면서도 속에선 뭔가 조금씩 조금씩 살이 찌고 있는 것 같아 보람을 느꼈다. (중략) 자랑할 거라곤 지금도 습작기처럼 열심히라는 것밖에 없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쓰고 있지만, 열심이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작가가 될까 말까 하던 4년 전의 고민은 아직도 끝나지않은 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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