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은영입니다!
십 대의 나는 빨리 성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성인이 된다는 건 어른이 된다는 것이었고, 어른이 된다는 건 많은걸 부모의 허락이나 강요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게 많아진다는 걸 의미했다.
그걸 원했다. 내가 원하고 내가 바라는 걸 선택하고 싶었다. 대학생이 된 후 나는 못 마시는 술도 마셔보고 남자친구도 사귀어보고 친구들과 여행도 다니면서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다 대학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이 되면서 대구에서 서울로 혼자 상경(?)하게 되었고 꿈에 그리던 혼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
자유롭고 행복한 것도 잠시...
20대 중반이 넘어가며 10대 때 내가 그렇게 원했던 어른이 삶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알아갔다.
어른이 된다는 건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시간이 있다면 혼자 지내는 외로운 순간이 있다는 걸 알아가는 것이었다. 하루의 수많은 선택 중에서 그 어느 것도 나의 선택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았고, 둘 중의 어느 것을 선택하면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마음 한편에 항상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었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고 선택해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는 건 그만큼 내가 책임져야 할 것도 많아진다는 걸 성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부모는 항상 변함없이 내 곁에 오래 머물다가 해가 저물어가는 어느 날에 자연스럽게 돌아가실 거라 예상했지만 부모의 목숨은 내가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사람이 살고 죽는 건 인간의 영역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 내 곁에 살아계시는 나의 엄마가 언제든 돌아가실 수 있다는 걸 자각하는 일이었고, 돌아가신 아빠를 그리워하는 건 남겨진 이의 몫이라는 것도 알게 되는 것이었다.
결혼해서 타인과 함께 살아간다는 건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고, 동시에 나조차도 몰랐던 나의 모습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건 또 하나의 세상이 열리는 것이었고, 엄마가 된다는 건 나 자신보다 누군가를 더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나를 키웠을 엄마의 마음을 알아가게 되었고, 아이가 자라는 만큼 나도 함께 성장하며 조금씩 진짜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0대 때의 나는 40대쯤 되면 세상의 이치를 대부분 알거라 생각했지만 40대 중반이 넘어가는 지금의 나는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고, 아직도 나의 엄마가 오래오래 내 곁에 살아계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살아오면서 겪은 수많은 일들 중에 겪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일도 많았지만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건 그런 일들까지 모두 겪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어느 순간을 빼놓고는 나의 삶을 이야기할 수 없다.
시간을 따라 변해온 내 겉모습도, 내가 머물렀던 공간들도, 내가 먹었던 음식들도, 내가 보고 들었던 영화와 노래들도, 내가 입고 신었던 옷과 신발들도, 시간 안에서 나와 함께하거나 함께 했던 모든 이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감사하고 무엇보다 소중하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은 이방인으로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한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그것이 비단 이방인으로서의 삶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내가 나로 살 수 있고 나로 설 수 있었던 것은 부모라는 뿌리가 있어서이고 그것은 내가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임을 담담하지만 아름다운 문체로 담아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돌아가신 아빠 생각과 혼자 남겨진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내게 어떤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오늘의 내가 있게 만들어준 가장 큰 사람들. 엄마와 아빠...
이제는 "은딸, 아빠다"라는 아빠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지만 내가 어디서 무얼 하든 항상 아빠와 함께 일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나에게 흔하지만 흔하지 않은 이름을 남겨준 사람도 아빠라는 걸...
(P370) 고골리를 형성한 것은, 결정적으로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은 바로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이것들은 사전에 준비가 불가능한 일들이지만, 되돌아보려면, 돌아보며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이해하려면 평생이 걸리는 일들인 것이다. 일어나서는 안 될, 제자리를 벗어난 곳에서 잘못 일어난 일들이지만, 결국 끝까지 삶을 지배하는 동시에 삶을 견뎌낸 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