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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두나무 Feb 23. 2024

랩걸(호프자런)

나무처럼 살아남아보자


결혼 전의 나는 내 손으로 밥 해 먹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하기 귀찮은 일이었다. 밥물을 어느 정도 맞춰야 하는지도 잘 몰랐고 어쩌다가 한번 집밥을 해 먹을까 싶어 장을 봐오면 해먹은 음식보다 남은 재료들을 갖다 버리는 날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랬던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며 변했다. 변한 건지 아니면 나를 둘러싼 환경에 적응해 나가기 위해 애쓴 건지는 정확지 않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자동으로 몸이 청소기로 향하고 청소를 하면서 잠을 깨운다. 결혼 전에 청소는 일주일에 한 번 출근하지 않는 주말에 겨우 하던 것이었지만 지금 나에게 청소는 아침에 일어나 양치를 하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청소뿐인가. 매일 하는 밥 심지어 하루에 적어도 두 번 많게는 세 번까지 하는 밥을 이제는 크게 힘 안 들이고 할 수 있다. 장을 안 본 지 한참 된 날은 그저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로 무슨 국을 끓이고 어떤 반찬을 만들지 내 머릿속의 메뉴판이 재빠르게 가동한다. 밥을 먹는 일은 준비하고 먹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설거지하고 남은 반찬을 냉장고에 넣거나 버리는 일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포함한다. 적어도 주부에게는 그렇다. 설거지도 예전에는 몇 개 안 되는 그릇을 꼼지락거리며 문지르고 씻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거의 기계 수준이 되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를 하는 등 모든 가사 노동은 속도와 효율이 월등히 높아졌다. 그것은 내가 그만큼 그 노동들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는 결과일 것이다. 생산성이 좋아졌다는 긍정적인 말로도 해석될 수 있겠다.


그중 나를 가장 생산성이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것은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엄마가 되면서부터이다. 엄마가 되면서 하루에 3시간도 제대로 못 자면서 아이에게 젖을 물렸고 아이의 이유식을 만들면서 재료의 영양소도 알아가게 되었다. 아이가 말을 할 때즈음 되어 어떤 재미난 책들을 읽어주면 좋아할까 싶어 그림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와 밤낮으로 읽어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읽는 그림책들이 대부분 아름답고 감동적인 스토리들로 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가 유치원,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졸업할 때마다 내 아이가 언제 이만큼 큰 건지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고 동시에 나는 아이에게 어떤 엄마인지 돌아보게 만들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 무엇인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게 되었고, 그것이 때로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동시에 '나'라는 사람의 바닥이 어디까지인지도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아이가 아프면 나의 일상은 스탑버튼을 누르게 되는데 그럴 때면 가끔은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엄마는 아프면 안 되는 사람이란 걸 아이를 키우며 알게 되었다.


내가 엄마라는 타이틀을 달고나서 여러모로 생산성이 좋아진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라는 타이틀은 나에게 또 다른 생산성을 떨어트리기도 했다. 그건 바로 엄마라는 이름뒤에 '나 자신'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엄마 되기에 몰두한 나머지 나를 제대로 돌아볼 시간도 마음의 여력도 없었다. 빠른 시간 내에 가사일을 해낼 수 있는 집중력과 참고 견뎌내는 인내심은 내 안에 쌓여가는 반면 나를 찾아가는 방법과는 벽을 쌓는 길이기도 했다.


나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아이에게 주는 만큼 아이는 쑥쑥 자랐고 아이는 어느새 나에게서 조금씩 독립하려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아직도 진행 중이지만 처음 그 사실(부모보다 친구가 더 좋고 내가 모르는 비밀이 하나둘씩 생길 때마다)을 접했을 때 참으로 난감하면서도 은근 배신감도 들었다.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 보면 아이를 낳아 키우는 과정은 한 명의 인간을 독립시키는 과정이 전부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키워서 내가 안고 가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결국은 나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시키는 것, 나의 모든 것을 쏟아내게 하지만 결코 나의 모든 것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나로서의 생산성을 키우는 일만이 남았다. 아이를 키우면서 쌓아온 인내심과 노동의 시간대비 효율성을 나의 일에 적응시키기만 하면 된다. 내가 나로 살 수 있는 일(읽고 쓰는 삶)을 찾고 그것을 꾸준히 할 수 있는 동력 또한 다른 누군가로부터가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단순하고도 명확한 진리를 엄마가 되고 나서야 깨닫는다.


예전의 나는 내가 모든 것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지금의 나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엄마가 되는 것과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것, 두 가지를 따로 떨어뜨리고는 나를 완성할 수 없다는 사실이 오늘의 나를 조금은 안심하게 만든다.









이 책의 저자(호프 자런)는 '과학 하는 여자'로서의 삶을 나무의 성장에 빗대어 현실적이면서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한 그루의 나무가 살아남기까지의 과정이 한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내기까지의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씨앗이 한 그루의 나무가 되기까지는 결국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우리의 인생도 비슷하다. 결국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삶을 끝까지 붙잡고 버티면서,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알아가고 꾸준히 열정을 불태우려는 삶의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저자가 여자로서도 과학자로서도 자기 자신으로서도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이자 방법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p272) 우리는 모두 일하며 평생을 보내지만 끝까지 하는 일에 정말 통달하지도, 끝내지도 못한다는 사실은 좀 비극적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대신 우리의 목표는 세차게 흐르는 강물로 그가 던진 돌을 내가 딛고 서서 몸을 굽혀 바닥에서 또 하나의 돌을 집어서 좀 더 멀리 던지고, 그 돌이 징검다리가 되어 신의 섭리에 의해 나와 인연이 있는 누군가가 내딛을 다음 발자국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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