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앵두나무 Mar 01. 2024

창조적 행위: 존재의 방식(릭 루빈)

나의 일상이 나만의 예술이 된다


어제는 2024년 2월 29일.

4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윤년, 윤일을 가진 날이었다. 하루가 더 생겨 올해는 365일이 아닌 366일이 된다.


아침에 관련 기사를 보고 생각했다. 뭔가 덤으로 생긴 듯한 하루를 의미 있고 보람차게 보내야지..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별개로 나의 일상은 그제와 다를 바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거실의 커튼을 걷고 샤시를 열어 환기를 시키고, 미지근한 물 한잔에 유산균 한 알을 먹는다. 딸아이를 깨우고 침대의 이불을 칼각으로 정리한다. 남편이 서둘러 출근을 하고 냉동실에 있는 새우를 녹이고 파, 양파, 버섯, 마늘, 계란을 넣어 새우볶음밥을 만들어 아점으로 딸아이와 먹는다.


밥을 먹고도 제 할 일(학원 숙제)을 하지 않고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딸아이에게 어김없이 큰 소리를 지른다.속으로 생각한다. 아... 오늘은 뭔가 의미 있게 보내려고 했는데 또 소리 지르면서 오후를 시작하네라고.…..후...


아점을 먹고 나온 몇 개 안 되는 그릇들을 설거지하고 커피를 한잔 내린다. 식탁을 깨끗이 닦고 줌파 라히리의 <로마 이야기>를 읽어 내려간다. 그녀는 어쩜 이리도 글을 잘 쓸까.. 이토록 여운이 남는 마무리라니.라는 생각을 하며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오후 특강을 간 딸아이 학원 픽업을 갈 시간이다. 데려오는 길에 한 달 전부터 맡기려 했던 청바지 수선을 위해 집 앞 수선집에 들러 바지 두 벌을 맡긴다. 밀린 숙제를 한 기분이다. 오래 묵혔다. 손잡이를 잡고 문을 나서려는데 수선집 사장님께서 나를 보더니 한마디 하신다.

"바지 이쁘네요!"

"네? 바지요?"

"바지 색깔이 이뻐요~~"

"아... 네. 좀 튀는 색이죠. 하하. 수고하세요!"

평생 옷을 만지신 분이셔서 그런지 츄리닝 바지의 칼라까지 눈여겨보시고 놓치지 않고 손님에게 표현하신다. 사람을 사소하게 기분 좋게 하는 건 이런 포인트인 거 같다고 생각한다.


집에 돌아오니 벌써 저녁을 준비할 시간이다. 북어채를물에 불리고 양파, 파를 썰어서 준비한다. 아차차! 무가 있는 줄 알았는데 냉장고의 야채칸을 아무리 뒤져도 없다. 착각한 모양이다. 괜찮다. 파를 넉넉히 넣으면 된다. 감자도 어슷 썰어 넣고 마늘도 다져서 넣어 팔팔 끓인다. 어제처럼 비가 내리는 날에는 기름 자작히 부어 바삭하게 구운 '김치전'이 제격이다 싶어 인덕션 위의 환풍기를 제일 강하게 틀고 빠르게 전을 굽는다. 노른자 터트리지 않고 생명력 있게 계란 프라이를 하고, 양배추를 가늘고 길게 채 썰어 옛날 돈가스집 식의 샐러드를 만든다.


밥그릇, 국그릇을 다 비우고 숟가락을 놓자마자 딸아이학원에 데려다주고 와서는 식기세척기를 돌리고 사과 한 개를 깎아 남편과 사이좋게 반쪽씩 먹는다. 옆에서 목이 빠져라 쳐다보고 있는 콩이(반려견)도 사과의 4분의 1쪽을 준다. 그즈음에 아이의 국어학원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고 새로 옮긴 학원에서 두 달간 잘 적응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고등국어를배워나갈지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가 오간다. 통화를 하면서 느낀다. 아이가 선생님이 진짜 좋다고 여러 번 얘기했었는데 왜 그렇게 얘기했는지.. 목소리에서, 톤에서 국어교육에 대한 진정성 있는 소신이 묻어났고 통화하는 내내 다정함이 휴대폰 너머로 전달되었다. 아이든어른이든 타인에 대해 느끼는 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다시 한번 또 깨닫는다.


아이를 픽업 갔다 와서 다시 내 서재방의 책상에 앉았다. 하루가 다 갔다. 하루를 의미 있고 보람차게 보내리라 다짐했는데 뭐가 있었나 아무리 빨리 감기를 해봐도 딱히 없었다.


돌아서면 밥을 하고 돌아서면 밥을 하는 중간중간에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마시고 싶은 원두를 골라 커피를 내려 마시고, 심심하지 않게 콩이(반려견)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아이에게 어김없이 목청을 높였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어제. 그런 날들이 쌓여 나의 일상이 된다.


나의 엄마에게 시어머니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다. 먼 타국에 있는 동생이 며칠 만에 사진 한 장을 보냈다. 별일 없다는 뜻이다. 이런 나의 하루가 비록 지루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나를 존재하게 하는 방식이다.


어제처럼 변함없는 나의 일상들이 나를 가장 창의적이게 할 수 있다는 걸, 타인과는 다른 내가 될 수 있게 한다는 걸 더디게 알아가고 있다. 내가 나의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그 방식을 글로 표현해 내는 것이 나만의 존재 방식임을 알아간다. 그리고 그것이 나만의 예술을만들어가는 방법이라는 것 까지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로듀서이자 작가인 릭 루빈은 말한다. 우리 모두는 각자 다르고 각자 다른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예술이 필요하고 그 예술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흔히 예술이라고 하면 뭔가 거창하고 화려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는 모두 존재하는 자체로 예술이 될 수 있다. 그저 내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고민해 보려는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P155) 예술의 목표는 완벽함을 얻는 게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다른 이들에게 공유하는 것이다. (중략) 예술이 가슴에 와닿는 한 가지 이유는 인간이 서로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품 속에 담긴 공통적인 경험에 끌린다. 그 안의 불완전함까지도 포함해서, 자신의 일부를 발견하고 이해받는 기분, 연결됨을 느낀다. (중략)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누군가의 숨겨진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을 만드는 것과 같다.






이전 13화 랩걸(호프자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