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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Park May 06. 2024

여행지에서 보내는 연서

이제 만날 수 없는 우리지만 그래도

안녕 J야, 호호


’ 안녕, J야‘라는 첫 줄을 쓰고 혼자 마음이 간지러워서 입꼬리를 씰룩쌜룩하며 아직 여백이 더 많은 편지지를 들여다보고 있네. 변태 같다. 오늘은 벌써 일본 여행의 마지막 날이야. 여행을 자주 다녀본 건 아니지만 실습 기관사 시절이나 엔지니어 시절 해외를 방문하면 엽서를 사는 습관이 있어. 다분히 의도적이고 인위적인 습관이지만 말이야. 손가락 몇 번으로 손쉽게 글을 전할 수 있는 당연하고 편리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손으로 눌러쓴 글을 전하는 아날로그적 마음에 대한 동경이 있어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 ‘편지를 받는 일은 사랑받는 일이고, 편지를 쓰는 일은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나도 낯선 곳에서 떠오르는 내 울타리 속 누군가에게 애정과 다정한 안부를 전하고 싶은 마음에서 쓰게 되는 것 같아. 난 누군가 쓴 편지를 읽는 게 너무 설레어서 너도 읽으면서 즐거웠으면 좋겠다.


  ‘가능할까.. 취소할까..’라는 의구심에서 시작한 여행이었는데 마지막 하루가 되었다니 그래도 오늘은 집중해서 뭔가를 쓸 수 있는 여유가 생겨서 안도하는 마음입니다. 처음 신치토세 공항에 착륙할 때 느낌은 상공에서 보는 지형이 너무 단조롭고 쓸쓸해서, 그리고 지면에 닿아보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요와 아득함이 가득해서 ‘겨울과 봄 사이에 계절이 하나 더 있는... 그런 나라에 왔구나’ 하는 느낌이었는데. 오타루, 삿포로-스스키노로 여행이 계속 이어지며 ‘아기자기함과 활력이 넘치는 도시구나’ 하는 생각으로 마무리가 되는 것 같아.


이 편지는 오타루에서 산 오르골과 함께 전달이 될 거야. 편지를 쓰는 일은 긴장과 백팔번뇌의 연속이랄까. 틀려서도 아니 되며... 작은 한 장에 불필요한 요소는 다 빼고 마음을 충분히 담아야 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써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면, 요즘 종종 숨을 가다듬거나 눈을 감고 혼재된 상념을 차분히 정돈시켜야 할 때 너랑 보낸 평온한 시간들을 떠올리는 게 많은 도움이 되었고. 1-2일 차 비가 오다가 3일 차 기차를 타고 오타루를 왔는데 아직 완연한 봄에 이르지 못해 살짝 추우면서도 으슥한 와중에 빛이 참 희고 맑은 거야. 하얗고 부들한데 손끝 발끝이 차서 내 손으로 감싸주고 싶은 너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킬킬...


아 얼른 한국 가서 또 ‘우움~~‘하며 너의 목 근처에 코박하고 킁카킁카 하고 싶은 것이... 넌 김치 같은 남자야... 나 여기 와서 김치보다 너 생각을 더 많이 해... 만나면 새초롬하게 말없이 걸어오더니 이제는 ‘안냐루세요?’ 하는 것도 너무 귀엽고, 입은 옷이 잘 어울린다고 하면 유치원 다녀온 조카처럼 ’ 음 하나 장만했지 ‘ 하며 뽐내는 것도 귀엽고, 길고 도도해 보이던 눈매가 본인 이야기 할 때 갑자기 번뜩 동그랗게 뜨고 눈알 굴리는 것도 귀여워... 큰 덩치로 안길 때는 내 키가 3 미터면 J너가 내 품에 쏙 들어올 텐데... 그만큼 못 커서 너를 온전히 다 품지 못하는 게 아쉬워... 러닝 얘기할 때 50대 아저씨처럼 설명하는 건 진짜 웃겨 정말. 오케이가 아니라 오께이~~ 하며 말 늘이는 건 또 누구한테 배운 말투인거람. ’어휴 정말 웃기다니까... 절레절레‘ 하게 되는 J 연상법.


우리가 수시로 만나서 뭔가를 다양하게 하기는 어렵지만 이건 다른 직장인이나 자기 일이 있는 보통의 연인도 그렇지 않나? 어떤 면에서 연애는 우정의 양상일 때 더 로맨틱하다고 생각해. 우리말하자면은 그렇고 그런 사이니까..... 그래서 꼭 환경에 따른 제약을 두기보다는 서로의 물 같은 일상에 종종 만나서 작은 티백처럼 뜨끈하게 우려내며 따뜻한 감정으로 지내봅시다.


여행을 시집에 비유할 수 있다면 삿포로 여행은 언젠가 읽었던 시집 속 시인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해주고 싶은걸. “언젠가는 당신과 이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 같다는 기분이 듭니다.”


자 그럼 또 만납시다 우리. 안냐루!


이 편지를 보내고 아무런 답장도 감상도 듣지 못한 채로 헤어졌는지도 모르게 관계가 끝났지만 여행지에서 그를 떠올리며 선물을 고르던 시간들, 편지를 쓰며 열렬하던 나의 애정 그 모든 것이 소중했기에 누구라도 이 편지를 보고 그런 제 마음을 알아주고, 또 우리 그럼에도 사랑을 하자는 격려를 보내주고 싶어 공개해봅니다. 흥 어쩔거야. 내가 널 좋아한 건 내 마음이고, 담백하게 표현했고, 받지 않은 건 너의 마음이고. 이후의 감당도 내 선택에 대한 내 몫이니 너는 행복하기만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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