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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마인더 Apr 21. 2023

사랑, 집착하는 마음

09.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그 소년이 자기한테 왔을 때 싯다르타는 스스로 부자이며 행복한 사람이라고 칭했었다. 하지만 그 사이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그 소년은 여전히 낯설고 어두운 표정을 하고, 건방지고 불손한 마음을 드러내 보였다. 싯다르타는 자기 아들이 옴으로써 자기에게 행복과 평화가 찾아온 것이 아니라 고통과 근심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소년을 사랑하였으며, 그 소년 없이 평화와 행복을 누리느니 차라리 그 소년 때문에 사랑의 고통을 겪고 사랑에서 비롯된 근심 걱정을 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였다.



바주데바가 말하였다. “그 아이를 시내로 데려다주세요. 그 아이 어머니의 집으로 데려다 주라는 말입니다. 아직 하인들이 있을 터이니, 그들에게 아이를 맡기세요. 그리고 만약에 거기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면 그 아이에게 스승을 구해다 맡기세요. 가르침을 받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소년들, 다른 소녀들과 어울리면서 그 아이의 세계에 살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당신은 내 마음속을 꿰뚫어 보고 계시군요.” 싯다르타가 슬프게 말하였다. “나는 자주 그 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그렇지 않아도 부드러운 마음씨를 갖고 있지 않은 그 아이를 내가 어떻게 그런 세계로 내보낼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아이는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지지 않을까요? 그 아이는 쾌락과 권세의 늪에 빠져 버리지 않을까요? 자기 아비가 저질렀던 모든 과오들을 되풀이하지 않을까요? 혹시 윤회의 소용돌이 속에 온통 휘말려 버리지는 않을까요?”



 
싯다르타(1922) 헤르만 헤세




사랑과 집착은 겨우 한 끗 차이가 날 뿐이다. 누군가, 무엇인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우고, 행복해지기도 했다가, 걱정하고 불안해지기도 한다. 사랑하는 순간 그 존재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은 함께 따라다닌다. 그래서 내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상대를 끌고 오려고 한다. 내 의도에 없던 상대의 행동은 당황스럽고 불편해진다. 왜 너를 걱정하는 마음을 모르냐고 답답해한다. 상대에 대한 존중은 점점 옅어지고 내 방식과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강요한다.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변했다고 하고, 저 밖에 모르고 이기적이라 비난한다. 어쩌면, 기대를 줄이는 것이,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는 것이 사랑의 유통기한을 더 길게 만드는 방부제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누가 사문인 싯다르타를 윤회로부터, 죄업으로 부터, 탐욕으로부터, 어리석음으로 부터 지켜주었던가요? 아버지의 경건함, 스승들의 훈계, 자신의 자식, 자신의 구도행위가 그를 지켜줄 수 있었던가요? 어느 아버지, 어느 스승이 지켜 서서 그를 말릴 수가 있었겠어요? 스스로 삶을 영휘 하는 일, 그러한 삶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일, 스스로 자신에게 죄업을 짊어지게 하는 일, 스스로 쓰디쓴 술을 마시는 일,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내고자 하는 일, 그런 일을 못하게 누가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설령 당신이 아들 대신 열 번 죽어 준다 하더라고, 그것으로 그 아이의 운명을 눈곱만큼이라도 덜어줄 수는 없을 겁니다.”



바주데바가 자기에게 하였던 말 가운데 자기 스스로가 이미 생각하지 않았거나 알지 못하였던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실천으로 옮길 수 없는 그런 앎에 불과하였다. 그러한 앎보다도 자식에 대한 사랑이 더 강하였으며, 그러한 앎보다도 자식에 대한 정이, 자식을 잃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자기의 불안한 마음이 더 강하였던 것이다.



사실 그는 여태껏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홀딱 빠져서 자신을 몽땅 바칠 수가 없었으며, 자신을 망각할 수가 없었으며,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어리석은 일을 저지를 수도 없었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자기와 어린애 같은 인간들을 구분해 주는 커다란 차이점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제 자기 아들이 나타나고 나서부터는 싯다르타도 완전히 그런 어린애 같은 인간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는 이 사랑이, 자기 아들에 대한 맹목적이 사랑이 일종의 번뇌요, 매우 인간적인 어떤 것이라는 사실과, 또 한 이 사랑이 윤회요, 흐릿한 슬픔의 원천이요, 시커먼 강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와 동시에, 그 사랑이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사랑이 필수불가결한 것이며 자신의 본질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느꼈다. 이러한 쾌락도 만족시키고 싶었으며 이러한 고통도 맛보고 싶었으며, 이런 어리석은 짓도 저질러 보고 싶었다.




싯다르타(1922) 헤르만 헤세




설령 당신이 아들 대신 열번 죽는다 하더라도, 그 아이의 운명을 눈곱만큼이라도 덜어 줄 수는 없을 거라는 아주데바의 말에 딱밤을 세게 한 대 맞은 것처럼 이마가 얼얼하다. 생각보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고, 바꾸려고 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왜 자주 잊어버릴까. 누군가와 만나면 왜 어른스러운 척 행동을 하려고 하고, 언니처럼, 누나처럼, 뭔가를 더 알고, 이해하고, 알려줘야 한다는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을까. 스스로 잘 살고 있는 남동생에게 어쩌다 오만 원 용돈을 주고서는 책 좀 봐야 한다. 적금은 들고 있느냐 하는 어이없는 걱정을 늘어놓았는지, 그런 순간들이 떠오를 때마다 아찔한 기분이 든다. 시간을 순간 이동할 수 있다면, 그런 순간들로 돌아가 내 이마에 딱밤을 놓고 싶다. 그 입술을 떼기 전에!!




아들이 볼 때 이 아버지라는 사람은 정말로 지겹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자기가 아무리 무례한 행동을 하여도 이 아버지라는 사람은 미소로 대하고, 자기가 아무리 악의를 보여도 선의로 대꾸하였는데, 바로 이런 점이야 말로 소년의 눈으로 볼 때는, 늙고 음흉한 위선자의 가장 가증스럽고 교묘한 술수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싯다르타의 성질이 폭발하여 아버지한테 드러내 놓고 마구 대드는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땔감으로 쓸 덤불을 모아 오라는 분부를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오두막에서 나올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버티고 서서 막무가내로 고집을 리며 분통을 터트렸으며, 바닥을 다지기라도 하듯 발을 동동 굴러댔으며, 주먹을 불끈 쥐고는, 성질이 폭발하여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아버지의 면전에다 대고 증오와 멸시의 말을 퍼부었다.



“이걸 잘 들어 두세요. 나는 당신을 괴롭히는 일을 할 거예요. 당신 같은 사람이 되느니 차라리 노상강도가 되든지 살인자가 되어서 지옥에나 갈 거란 말이에요. 난 당신을 증오해요. 당신은 절대로 내 아버지가 아니에요. 설령 당신이 열 번이나 내 어머니의 정부였다고 해도 말이에요.” 다음날 아침 아이는 사라져 버렸다. 두 뱃사공이 뱃삯으로 받은 동전과 은화를  보관해 두던, 두 가지 색깔의 나무껍질로 짠 작은 바구니도 없어져 버렸다. 나룻배도 사라지고 없었는데, 싯다르타는 그 나룻배가 맞은편 강가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싯다르타는 도망친 아들을 찾아 나서기 위하여 그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바주데바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싯다르타는 벌써 오랫동안 숲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에, 그 아이를 찾아 서는 일이 쓸데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그렇지만 그는 쉬지 않고 계속 달렸다. 도시근교에 폭이 넓은 다리에 다다랐을 때 그는 옛날에 카말라의 소유였던 그 아름다운 정원 입구에 멈추어 섰다. 싯다르타는 그 정원의 대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고 나서 자기를 이 장소까지 오게끔 내몰았던 욕망이 어리석은 욕망이라는 것을, 자기가 아들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자기가 아들에 집착하고 애착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망친 아들을 쫓아 여기까지 자기를 뛰어오게 만들었던 그런 욕심에 찬 목적의식이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에 공허한 마음이 대신 들어서 있었다. 비참한 심정이 되어 그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원에 있던 승려들이 그를 보았다. 그리고 그가 많은 시간 동안 쭈그리고 앉아 있었고 그의 잿빛 머리카락 위에 먼지가 잔뜩 쌓이고 있었기 때문에, 한 승려가 와서는 바나나 두 개를 그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그는 그 승려를 보지 못하였다. 이렇게 응고된 듯한 무감각 상태에 빠져있던 그를 깨운 것은 어떤 손길, 그의 어깨에 닿은 어떤 손길이었다. 상냥하고 수줍은 이 손길을 알아채자마자 금방 제정신을 차렸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자기를 뒤쫓아온 바주데바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아무 말 없이 바주데바와 함께 숲으로, 나루터 집으로 되돌아왔다. 아무도 그날 일어났던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그 아이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았으며, 아무도 그 아이의 도망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으며, 아무도 그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싯다르타(1922) 헤르만 헤세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가, 네가 잘 모른다는 것을 좀 알아라!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머리로는 맞다. 그렇지! 하면서도, 그렇다고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하는 일은 없다. 후회하고도 또 비슷한 실수를 하고, 자책하고 또 다짐한다. 모자란 나 자신을 껴안아 주면서, 열 번 할 실수를 아홉 번으로, 아홉 번에서 여덟 번으로 줄여나갈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히 괜찮은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사랑 뒤로 숨긴 욕망, 조용히 숨죽여 있다가 어디선가 솟구쳐 나와 나를 꼼짝 못 하게 하는 목적, 하나 더 가져도 금세 또다시 갈증을 느끼게 하는 욕심. 더 이상 이것들을 쫓아 숲 속을 헤매지 않고, 바로 뒤돌아 올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생기는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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