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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울리 Slowly Apr 24. 2023

어쩌면,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10.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는 아들이나 딸을 데리고 다니는 많은 여행자들을 건네다 주어야 하였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는 부러움을 느끼며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 “이토록 많은 수천의 사람들은 이처럼 애정이 가득 담긴 행복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지 못할까?” 이제 그는 이렇듯 단순하고, 이렇듯 사리분별도 없이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는 어린애 같은 인간들을 닮아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예전과는 다른 눈으로 보았다. 예전보다 덜  총명하고 덜 오만스러워진 대신에, 더 따뜻하고 더 호기심이 많고 더 많은 관심으로 지닌 눈으로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의 허영심, 탐욕이나 우스꽝스러운 일들을 이제 그는 웃음거리가 아니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일, 사랑스러운 일, 심지어는 존경할 만한 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처가 극심하게 쑤셔대자, 마침내 싯다르타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강은 밝고 맑은 웃음소리를 내며 싯다르타를 비웃고 있었다. 강물소리를 좀 더 자세히 듣기 위해 강물 위로 몸을 굽혔다. 그리고 고요하게 흘러가는 강물 속에 자신의 얼굴이 반사되는 것을 보았다. 이 반사된 얼굴에서 그는 까맣게 잊고 있던 어떤 기억을 더듬어 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고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었다. 그 얼굴은 자기가 예전에 알았었던, 사랑하였던, 또한 두려워하였던 어떤 사람의 얼굴과 비슷하였다.



그것은 바라문이었던 자기 아버지의 얼굴과 비슷하였다. 그러자 자기가 아주 오래 전인 젊은 시절에 고행자들한테로 가게 해 달라고 아버지를 강요하였던 일하며, 자기가 아버지에게 작별을 고하였던 일 그리고 길을 떠난 다음에 돌아가지 않았던 일들에 대한 추억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아버지 또한 자기 때문에, 자기가 지금 아들 때문에 겪고 있는 것과  똑같은 고통을 겪었던 것은 아닐까?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을 다시는 보지도 못한 채 이미 오래전에 홀로 외롭게 돌아가시지는 않았을까? 이것은, 이러한 반복은 이처럼 숙명적인 순환의 테두리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도는 것은 한 바탕의 희극, 기이하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싯다르타(1922), 헤르만 헤세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삶의 목적은, 혹은 완성은 어딘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루를 살아 내는 오늘, 이 순간순간의 생각과 행동 속에 존재한다. 생은 끊임없이 흐르며 순환한다. 아이가 소년이 되고, 소년은 청년이 되고, 청년은 성인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 노인이 된다. 우리는 다른 어딘가에 반드시 이르러야 하는 것일까. 지금 숨쉬는 이 순간이 이미 삶의 의미고 목적은 아닐까.




바주데바는 오두막 안에 앉아 바구니를 짜고 있었다. 그는 이제 나룻배로 강을 오가는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시력이 약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시력뿐만 아니라 손과 팔도 약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의 얼굴의 기쁜 표정과 환한 호의의 표정만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빛나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그 늙은이 곁에 자리 잡고 앉아 서서히 말하기 시작하였다. 싯다르타는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 사람이 이제 더 이상 바주데바가 아니요, 이제 더 이상 인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귀 기울여 듣고 있는 이 사람이 스스로의 내면으로 마치 한 그루의 나무가 빗물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자기의 고백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이 사람이 바로 신 그 자체라는 것을, 점점 더 강렬하게 느꼈다. 



강물은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가 비가 되어 하늘로부터 다시 아래로 떨어져서 샘이 되고, 시내가 되고, 강이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갔으며, 또다시 새롭게 흘러갔다. 싯다르타는 귀를 기울였다. 그는 이제 온통 귀 기울여 듣는 자가 되어, 온통 듣는 데 몰하였으며, 마음을 온통 비운채 온통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이제 귀 기울여 듣는 법을 끝까지 다 배웠음을 느꼈다. 



이 순간 싯다르타는 운명과 싸우는 일을 그만두었으며, 고민하는 일도그만두었다. 그의 얼굴 위에 깨달음의 즐거움이 꽃 피었다. 어떤 의지도 이제 더 이상 대립하지 않는, 완성을 알고 있는 그런 깨달음이었다. 그 깨달음은 함께 괴로워하고 함께 기뻐하는 동고동락의 마음으로 가득 찬 채, 그 단일성의 일부를 이루면서 그 사건의 강물에, 그 생명의 흐름에 동의하고 있었다. 



바주데바는 강가의 앉은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싯다르타의 눈을 들여다 보고는, 그 눈에서 깨달음이 즐거움이 밝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신중하고 상냥한 방식으로 싯다르타의 어깨를 손으로 살며시 만지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친애하는 친구여, 나는 이 순간을 기다려 왔었어요. 이제 그 순간이 왔으니, 나를 보내줘요. 오랫동안 나는 이 순간을 기다려 왔으며, 오랫동안 나는 뱃사공 바주데바로 살아왔어요. 이제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잘 있거라 오두막아, 잘 있거라 강물아! 잘 있어요. 싯다르타!”
싯다르타는 작별을 고하는 그 사람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였다. 




싯다르타(1922),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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