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변산 가을 산책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교과서에서 본 시였는데, 그다음 문구가 뭐였지요?"
엉뚱한 질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던져봤다. 함께 걷던 사람들 중 아무도 바로 답하지 못한다. 두세 명의 MZ세대는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낸다. 아무래도 생각보다는 검색에 익숙한가 보다. 기억을 꼭 머릿속에 넣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작은 길을 걸어서'잖아요!"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그다음 문구는 뭐였지?"
굳이 대답하지 않는다. 그냥 웃거나 머리를 긁적인다.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들. '당신은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또 잘난 척을 시작하네요.' 그들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잖아요.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나 때는 이 시를 수십 번 읽다 보니 달달 외웠는데. 그래야 대학교 갈 수 있었으니까. 작가가 누군지는 알겠지요?"
꼰대라는 소리를 들어도 좋다고 생각하며 계속 떠들어 댔다. 이 분위기라면 그 정도의 꼰대 소리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듣는 사람들도 이 유쾌한 잘난 척을 그리 불편해하지는 않는 듯하다.
4지선다형 시험문제를 풀며 외웠던 그 시가 지금도 또렷이 떠오른다. 획일적인 암기식 교육이, 세월이 지나도 이렇게 몇 문장의 기억으로 남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사람은 한 번 기억했던 것을 다시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기억은 이미 우리가 한 번 기억한 것들이다. 아마도 살아오면서 언젠가 이 시를 몇 번은 되새겨 보았기 때문에 기억하는 것이다.
비 온 다음 차분하게 가라앉은 가을 오후. 산책로 입구 오른쪽에 있는 작은 절을 지나 아늑한 계곡을 따라 1시간 넘게 걸었다. 노랑과 붉은색, 그리고 아직 남은 초록빛이 산을 덮고 있다. 포근한 담요 같다.
생각하며 걷기에 좋고, 아무 생각 없이 걷기에도 좋은 길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졌지만 발걸음은 편안하다. 출발 전에 산행은 힘들다며 겁먹던 친구도 웃는 얼굴로 잘 따라온다.
계곡 안쪽에 작은 호수 하나가 나타났다. 오늘 산책의 조용한 반전이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 스마트폰을 꺼낸다. 산과 호수를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고, 서로 편한 사람끼리 둘씩, 셋씩 모여 또 찍는다. 풍경도 찍는다. 기억하기 위해서다. 각자의 스마트폰과 전파를 타고 어딘가에 저장된 그 장면이 언젠가 지금의 기억을 불러올 것이다.
호숫가를 걸어 작은 폭포까지 보고 다시 돌아오는 길. 초고화질 화면처럼 선명하게 새겨진 그 풍경이 머릿속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지난겨울에 만나서 봄과, 그 뜨거운 여름을 함께 보낸 이들과도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이제는 만남과 이별이 익숙한 나이다. 익숙하다고 해서 마음이 편한 건 아니다. 몸살 기운이 조금씩 퍼지듯, 어딘가 욱신거리는 감정이 서서히 올라온다.
계곡을 벗어나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떠나는 건 끝이 아니다. 다음 만남을 위한 준비일 뿐이다. 승려이자 시인이었던 그분의 시 문구를 바꾸어 써본다.
"우리는 새싹이 돋을 때에 낙엽이 지는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낙엽이 질 때에 다시 봄의 새싹이 돋아 날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