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흔적 대신 마주친 생명
회문산. 6.25 전쟁 당시 빨치산 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일대에서 빨치산과 군경 사이에 오랫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민족 분단과 이념 갈등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스러져 간 곳이다. 어딘가에 그때의 흔적이 남아 있고 그들의 외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그 공간을 걸어보고 싶었다.
봄 새싹이 돋아나기 전에 오르려고 했지만, 입구 쪽 시설공사를 하면서 출입이 통제되었다. 결국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이 오기를 기다렸다.
산이 풀로 덮이는 계절을 피한 이유는 단 하나, 좁은 등산로에서 만날 수 있는 뱀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외진 산 길목에는 뱀이 똬리를 틀고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왜 다른 동물보다 뱀을 유달리 무서워할까? 융(Carl Gustav Jung)은 인류가 역사와 진화를 통해 공유하게 된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이 있다고 했다. 개인이 경험하지 않았어도 공통된 상징, 이미지, 감정 반응이 나타나는 이유라고 한다. 예를 들어, 인간 정신의 깊은 구조에 뱀은 징그럽고 무서운 존재, 강아지는 귀여운 존재, 꽃은 아름다운 존재로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뱀을 두려워하는 이유에는 오래된 개인적인 경험도 있다. 어릴 때 시골에서 몇 년간 살았다. 좁은 길에는 자동차나 경운기 바퀴가 지나는 자리 외에는 한가운데도 풀이 자랐다.
어느 여름날, 길 위에 무성하게 자란 풀이 축축하게 젖어 있던 날, 혼자 걷고 있었다. 한순간 푸르스름하고 미끄러운 생명체가 발등의 맨살 위를 휙 지나서 길 바깥으로 사라졌다. 촉촉하고 미끈한 긴 호스 같은 존재가 하필이면 발 위로 지나간 것이다. 그 이후 수십 년간 뱀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는 없었지만, 지워지지 않는 생생한 느낌은 남아 있다.
드디어 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 두 명의 든든한 동지와 함께 산행을 시작했다. 무장한 군인들이 국회에 난입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며칠 후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어느 날이었다.
자연휴양림 가장 위쪽에 차를 세우고 출발했다. 회문산 정상까지 바로 가는 길은 너무 짧기 때문에 인근 장군봉을 거쳐서 가기로 했다.
마른 나뭇잎 쌓인 계곡을 따라 오르니 임도가 나왔다. 임도가 끝나고 나서 장군봉까지는 로프를 잡고 오르는 구간이 있을 정도로 험했다. 댐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호수 옥정호와 주변 풍경을 돌아보고 회문산으로 향했다.
능선 따라 회문산으로 가는 길에는 산에서 자라는 대나무가 어깨 높이까지 빽빽하게 들어찬 곳이 몇 군데 있었다. 헤치고 지나갈 때 밑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똬리 틀고 있는 뱀이 있더라도.
"신속하게 통과!"라고 외치고는 뛰었다. 뒤따르던 동료들도 같이 뛰었다. 이런 구간을 몇 번 지나고 나서 정상에 도착했다. 동료들이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한 노부부가 하산하기 전 무릎 보호대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분들은 계곡에서 바로 올라온 듯하다. 사진 찍고 주변 산과 들을 잠시 둘러보고 나서, 이번에는 올라왔던 계곡으로 곧장 내려갔다.
햇빛이 내리쬐면서 오전에 올라올 때보다는 공기가 따뜻해졌다. 산을 내려갈 때는 발걸음이 가벼우므로 이런저런 짧은 생각에 잠겼다. 그때, 한 걸음 앞에, 검고 미끄러운 존재가 바위틈으로 빠르게 숨어들었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가장 짧은 경로로 마치 빨려 들어가듯이 유연하게 바위틈으로 들어갔다. 어린 뱀이었다!
따라오는 동료들에게 뱀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두려움보다는 놀람 때문이었다.
'결국 이렇게 만나는구나. 다행이다. 큰 뱀이 아니라서.'
무겁고 딱딱한 신발로 밟지 않은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호흡을 가다듬은 뒤 다시 계곡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두 명 동료 중 누구도 앞장서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좁은 길과 주변을 세심하게 살피면서 발걸음을 떼었다. 50미터 정도 더 걸었을 때, 다시 한 마리 뱀이 같은 방식으로 바위 사이로 숨어들었다. 짙은 갈색 얼룩 무늬. 역시 작은 뱀이었다.
아직 겨울잠에 들 은신처를 찾지 못한 걸까?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기 전에 아쉬움으로 땅 위에서 며칠이라도 더 보내려고 남아 있었을까?
그날 빨치산의 흔적은 보지 못했다. 바위에 남겨진 총탄 자국도, 지하 벙커시설도 발견하지 못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나뭇가지에 남아 붙어 있던 단풍잎과 길목에서 만난 어린 두 마리의 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