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기술
자다가 일어나 전화를 받고, 그래도 잠이 덜 깨서 빈둥거리다 배가 고파왔다. 하루는 꼼짝 않을 요량으로 사두었던 쏨땀과 밥은 냉장고에 넣어두고 옷을 갈아입는다. 오늘 처음 도전해본 식당의 쌀국수는 국물이 너무 적다. 인상적이게도 얼음과 물을 공짜로 주는데 팍치(고수)나 양배추, 숙주도 원하는 대로 가져다 먹을 수 있게 해두었다. 짠 국물엔 공짜 물을 넣어 입맛을 맞추고, 20밧짜리 국수 이렇게 양이 많아 남는 게 있겠냐며 냠냠 먹는데 컵이 지저분했던 걸까 떠놓은 물에 기름이 둥둥 떠 있다.
대번에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차마 성질대로 그 물을 버려버리지는 못했다. 물 한 컵도 사먹어야 하는 나라에서 기름기 뜬 물이라고 냅다 버리기에는 죄책감이 드는 까닭이다. 벌컥벌컥 들이켜진 못했지만 소심하게나마 입은 헹굴 만큼 물을 마시고 계산을 한다.
국수도, 어묵도 모두 먹을만했다며 오늘의 쌀국수도 성공이라며 자축한다. 음식 자체가 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니 음식 맛을 느끼는 것도 한결 쉬워졌다.
국수를 먹는 동안도 눈앞이 빙빙 돌더니 먹고 일어서니 컨디션이 좋아졌다. 기쁜 마음으로 로띠를 하나 사고, 좋아하는 옥수수도 산다.
"사와디카(안녕하세요)"인사하니 옥수수 아가씨가 내게 수줍게 인사해준다. "사와디카"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오는 길.
"저기요!!!" 큰 소리로 들리는 한국말.
어제 두루치기 파티를 주관하셨던 여행자 아주머니셨다.
100밧치도 넘어 보이는 음식을 주문해 놓고는 함께 먹을 사람이 없어 난감하던 차였다면서 같이 좀 먹자고 하신다.
이미 저녁은 먹었건만 먹었다고 말도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여러 나라 여행을 많이 다니셨다는 말씀처럼 여행이 익숙해 보이는 분이시다.
연세도 있어 보이는데, 가정은 어떻게 하고 오셨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본인은 남의 일엔 관심이 없다고 하시면서 그래서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과는 통성명도 하지 않는다고 하신다는 말에 그녀를 향했던 내 궁금증이 한순간 저속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나는 내가, 남의 일에 관심이 없진 않지만 오로지 호기심 충족만을 위해 상대의 인적을 캐물을 만큼 경우가 없지는 않다 믿고 싶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나 시작하는 대화는 주로 아주머니께서 이어나가셨다.
게스트하우스 흉보기. 게스트하우스 투숙객 흉보기. 여행객들 흉보기......
분명 말씀하신 것들 중에서 틀린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대부분 맞는 말씀이었지만 대화가 너무 피곤하다.
외국인들이 본 한국 사람들의 특징 중에서 둘만 모이면 남 흉보기라는 항목이 순위에 들었던 것을 봤는데 만약 그런 부분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고민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고 산다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에게는 익숙한 것이라 그거 말고 무슨 말로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막상 며칠 만에 타인과 마주앉아 나누는 대화의 주제가 흉보기가 되니 거기서 나오는 부정적 기운이 자꾸 나를 짓누른다. 분명 맞는 말씀이라는 것도 알겠고 분명 그럴 수 있다는 것도 아는데도 자꾸만 기운이 떨어진다.
별로 대꾸할 말도 없어 맞습니다, 그렇네요, 맞장구만 치고 앉아 자리를 떼운다.
남의 일엔 관심이 없다고 하시더니, 기어이 나의 인적사항을 알아내고야 마신다.
여유 있는 삶에의 내 바람을 들으시더니 젊은 사람이 한심하다고 생각한다며 목소리를 높여 일장 연설을 하신다. 그러더니 봐준다는 듯 또 한편 사람이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고 하신다.
남편은 어디 가서 내 얘기는 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해버리고 말았다. 목구멍까지 튀어나오는 말을 참기가 어려워 내뱉고 말았지만 속이 시원하지도 않다. 다만 그분이 모레면 떠날 단기 여행자라는 것에 안도한다. 남은 이틀 동안 다른 분들께 내 얘기만 하지 말아주셨으면 한다. 그렇지 않아도 남성 투숙객이 많은 이곳 게스트하우스에서는 혼자 몸으로 장기체류를 목적으로 한다는 나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여자 혼자 어쩌다가.. 정도의 시선이지 말도 안 되는 음흉함의 표현은 아니다)
조용하던 게스트하우스가 떠들썩하다.
방음이 잘 된다고 생각했는데, 건넌방 한국인 청년들이 들어오고는 대화 내용도 또렷하게 들리는걸 보면 그저 조용했던 탓인가 보다. 잠깐, 최근 통화에서 혹시 남이 들어선 안 될 말을 하진 않았는가 고민해본다. 그렇지 않아도 새로 바꾼 방은 소리가 많이 울리는데 앞으로 통화할 때 목소리를 키우지 말아야겠다.
치앙마이 구석구석엔 생각보다 장기 여행자도 많고, 생각보다 장기 체류자도 많은 것 같다.
얼마 전부터 메일 친구로 지내는 또래의 여자분이 한 달 정도 목적으로 방을 구한다기에 방을 함께 쓰지 않겠느냐 제의했다가 거절의 말을 들었다.
외로웠던걸까? 꼭 옆에 누군가 있어야 되는 타입의 인간도 아니면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같은 지역에서 방을 구한다는 말만 듣고 룸메이트 제안을 하다니 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예전 방콕에서처럼 방을 따로 쓰는 조건도 아니고 방값을 절약하기 위한 목적도 아닌, 단지 같이 살자는 그 의미 자체로만 따진 룸메이트 제안. 위험했다. 그분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혼자도 괜찮다. 외로움은 어쩔 수 없다.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내일은 정신을 차리고 집을 알아봐야겠다.
혼자서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