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페 디짜이(7-1) -첫 번째 수다모임

9월 24일 금요일 오전 10시 53분-첫 번째 수다모임(1)

by 서화림

집에서 가까운 탓인지 너무 일찍 도착했다. 산티탐 오거리 중 한 골목에 있는 내 원룸에서 또 다른 산티탐 오거리의 까페 디짜이까지는 채 5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얼마 전부터 산티탐 골목에 한인 게스트하우스가 생긴다며 기다리는 여행자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벌써 손님을 받는 줄은 몰랐다. 오픈 준비, 공사에 대한 글이 여행자 커뮤니티에 올라올 때 관심 있게 읽었던 것은 내가 처음 치앙마이에 도착했을 때 일주일가량 머문 숙소가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태국인과 결혼한 유럽인이 주인이었는데 산티탐에 집을 구하려고 발품을 팔다 팔다 지쳐 다른 지역으로 자리를 옮길까 고민하던 중 지금 집을 소개해준 인연으로 인사를 하고 지내는 사이가 됐었다.


그때 나는 치앙마이에 와서야 태국 북부에는 바다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정도로 치앙마이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상태였다. 도망치다시피 떠나오다 보니 님만해민이나 타패 게이트같이 한국 사람들이 많이 묵는 쪽보다는 태국인들이 많이 사는 곳에 자리를 잡고 싶었다. 방콕, 파타야, 푸켓을 선택하지 않은 것도 너무 유명한 여행지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15개월의 시간과 태국이라는 행선지만 있으나 목적지는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름만 보고 고른 여행지가 치앙마이였다. 바다의 도시에 어울리는 이름 같았다. 15개월, 태국, 치앙마이. 그리고 또 어디? 주거지를 확정하기 위한 주소는 더 세세한 정보를 요구했다. 세계여행을 쓰는 여행자의 블로그를 통해 님만해민과 타패게이트 중간쯤 어중간한 부분에 위치한 산티탐을 처음 알게 됐었다. 밤새 그녀의 블로그를 정독하고 그녀가 살폈던 집 중 내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적어 놓는 정도가 내가 했던 치앙마이 여행 준비의 전부였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제가 아직 준비가 덜 끝났으니 잠깐 둘러보고 계세요,"

나보다 성질 급한 사람 한둘은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마주 인사하고 들어간다. 이미 알고 있던 공간인데 새삼스러운 게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원래 1층엔 세탁기와 컴퓨터, 간이주방이 있었는데 그 공간이 까페로 탈바꿈한 것이다. 입구 기둥에 붙은 까페 디짜이 문패가 마음에 든다. 단독주택이 많던 시절에는 집집마다 문패가 붙어있었는데 내 부모가 첫 집을 샀을 무렵부터는 주거환경이 점점 아파트로 옮겨가며 101호, 903호 같이 호수로 집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이사를 많이 다녔던 나는 집집마다 붙어있던 문패가 부러웠던 것 같다. 뭐라 적힌 건지 읽지도 못했던 문패를 하나만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언뜻 봐도 돈을 많이 들인 인테리어는 아니었다. 세련되지도 않았다. 그래도 깔끔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있었다. 깨끗하게 칠한 벽이 하얀색인 것이 마음에 들었고 새로 깔지 않고 원래부터 있던 타일도 그 덕에 한층 말끔해보였다. 엄마가 시어머니에게 물려받곤 아빠 눈치 보느라 버리지도 못하고 거실 어정쩡한 위치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걸 얻어온 것 같은 물고기 자물쇠로 잠그고 위아래로 문을 열어 쓰는 나작한 옷장 위에는 레트로 느낌이 나는 블루투스 스피커가 놓여 있었고 그 위 벽에는 엽서가 붙어 있었는데 손글씨가 적힌 엽서는 글씨가 보이는 쪽으로, 풍경이 예쁜 엽서는 그림이 보이도록 앞뒤, 앞뒤 교차로 붙여 놓았다. 그 옆 벽을 타고 작은 사무실과 화장실이 있고 또 다른 쪽 면으로는 커피머신과 냉장고가 있는 작은 주방이 열려있었다. 천장에는 전 주인이 있을 때도 달려있던 커다란 실링팬이 느리게 돌아가고 있었다. 넓지 않은 공간이라 그정도만 채워도 여유가 많지 않았다. 중요한건 여기까지야, 라는 느낌으로 공간배치가 끝나고서야 남는 공간에 대충 채워 넣은 것 같은 서너 개의 테이블이 놓여있을 뿐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커피 한잔 드릴까요?"

간단한 화장을 마치고 알이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며 사무실 밖으로 나오던 주인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오래 씹어 단물 다 빠져버린 풍선껌을 씹는 것 같이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짧지 않은 시간 태국을 드나들었는데 안경을 낀 사람을 많이 못 봤다. 패션안경류를 쓴 사람들은 봤는데 저렇게 알이 두꺼운 안경은 보지 못한 것 같다. 알이 두꺼운데 테까지 두꺼우니 더워 보인다. 한때 나도 저렇게, 어쩌면 저것보다 더 두꺼운 안경알을 코에 얹고 다녔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남들도 나를 보며 덥다했을까. 20대 때 처음 태국을 찾았고 얼마간 머무르며 영어를 배우던 시절 한국에 돌아가기 전날까지 개인교습을 받았는데 그 마지막 수업 날 처음 렌즈를 끼고 갔더니 같은 20대였던 교사가 그날 처음으로 데이트신청을 했던 생각이 났다. 그땐 단지 서양 애들은 안경 낀 걸 싫어한다더니 정말 그런가 싶었는데 오늘 저 사람을 보니 더워 보여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매일 이러고 왔으면 너에게 좀 더 일찍 데이트 신청을 했을 텐데."하고 말하던 과외선생의 얼굴이 기억났다. 10년 세월에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모임은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저는 어쩌면 오늘 아무도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거든요. 와주셔서 너무 기뻐요."

예의 그 꼭꼭 씹는 말투로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저도 여기 하옉 산티탐 골목에 살거든요. 꽤 오래 전에 전단지 붙여놓으신걸 봤어요. 그땐 별생각 없이 지나다니다가 엊그제 비 많이 왔던 날 사장님을 봤거든요."

"아, 저도 기억나네요. 낮에 비가 엄청 쏟아졌잖아요. 그날 저를 보셨다고요? 어디서요?"


"저는 집에 있었어요. 제가 밤낮이 바뀌어서 보통 오후 늦게야 일어나거든요. 베란다 나가서 비오는 거 구경하는데 사장님이 지나가시더라고요. 그리고 좀 지나서 비 그치고 볕 나오고 동네 다 말랐잖아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런데 사장님이 또 보이더라고요. 집이 작아서 거실에 앉아서도 바깥이 잘 보여요. 그런데 저희 건물 앞에 뭘 붙이시더라고요. 그땐 그게 뭔지 몰랐어요. 안경 때문에 기억이 난거지 누구신지 몰랐으니까요. 나중에 저녁 먹으러 나가면서 보니까 그때 그 전단지를 붙인 게 사장님이셨던 거죠. 보기는 했지만 누가 붙였는지는 관심이 없었는데 그거 붙이러 다니시는 거 보고 관심이 생겼어요. 아시다시피 여기서 뭔가 일을 하는 사람들은 통 자기 몸 써서 일을 하는 법이 없잖아요."

"그러셨군요. 오늘은 일찍 일어나셨네요. 모임 오시려고 일찍 일어나신 거예요?"

"아뇨, 자야 할 시간에 자지 않고 왔어요. 자면 못 일어나서요."

"그럼 지금 피곤하시겠네요. 커피 한잔 드릴까요?"


그때 게스트하우스 앞에 주차한 파란색 차에서 눈에 띄게 예쁜 여자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하얀 얼굴에 갈색 눈동자, 길게 뻗은 눈썹과 빨간 입술. 어딜 봐도 예쁘지 않은 데가 없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에 적당한 웨이브가 꼿꼿한 등허리에서 구불거리고 있었다. 큰 키에 걸쳐 입은 저지 롱원피스 아래로 보이는 얇은 발목과 굽 높은 구두가 잘 어울렸다. 그녀의 모든 것에 생기가 있었다. 마치, 봄볕아래 서있는 것 같은 그녀가 까페 디짜이로 걸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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