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갯불에 콩 구워, 이사
그러니까 처음엔,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침대 머릿장 위 벽에 있는 작은 얼룩은 처음에 봤을 때는 내 손바닥보다 작았는데 뭘까 싶어 손가락으로 문대봤지만 요지부동.
금세 잊었다, 작은 얼룩 같은 건.
얼굴이 건조한걸 보면 비가 오는 것과 상관없이 습기가 많은 건 아닌데 어느 순간 더 이상 침대시트가 뽀송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눅눅함이 견디기 어려웠지만 비도 많이 오고 하늘도 흐리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일주일이나 비가 더 오고 나서야 알았다.
작은 얼룩이 벽을 온통 칠하고 있다는 것을.
비가 많이 오는 날이 늘수록 점점 얼룩이 커져갔다. 손을 대봤는데 보이는 것처럼 물이 묻어나진 않는다.
그래서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 동네의 습도란 고정적인건지 햇볕이 쨍쨍하다고 건조하다는 느낌이 있지도 않지만 날씨가 흐리다고 해서 습하다는 느낌이 들지도 않는다. 어차피 일 이주일 시간이 지나면 우기가 끝이 날 테고 햇볕이 비추는 날에는 얼룩도 좀 작아지니까 우기가 끝나면 다시 뽀송한 시트에서 잠을 잘 수 있겠지 싶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전망이 일품인 내 방을 포기하고 싶지가 않았다.
안정적인 구조의 내 방이 좋았다.
곰팡이만 슬지 않으면 건강엔 이상 없으리라 믿었고, 벽지가 발라져 있지 않으니 곰팡이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매일매일 일주일, 비가 내리고 나자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마지막 밤은 그 냄새에 폐가 아픈 것만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방에 들어갈 수 없어 거실 비좁은 소파에 누워 밤을 지새며 '치앙마이 우기' 검색을 해봤다.
5월부터 10월이라고 나오던데 이번 달이 끝나면 우기도 슬 끝이 보이리라 믿었건만 10월 까지라니. 안되겠다. 밤을 새워 아침이 되길 기다리고 몇 번이나 톰아저씨의 사무실 앞을 왔다갔다한 후에, 드디어 방을 옮길 수 있었다.
아침 10시에 엄청난 소리로 복도를 울려대는 음악을 틀어놓는 서양인 아가씨의 이웃이 되고 싶지는 않아서 3층 원래 있던 층의 방을 보겠다고 하니 내 옆집밖에 방이 없다고 한다. 기왕이면 나는 가장자리 집이 좋은데.
분명히 같은 구조의 집을 반대로 해놓은 것뿐인데 그것이 또 묘하게 신경을 헤집는다. 안정되지 않는 구조라고 생각된다. 볕이 들지 않는 화장실이지만 어딘지 더 어둡고 눅눅한 것 같다.
그래도 뽀송한 침대를 한번 만져보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시작한 일요일의 이사는 여유를 두고 하고 싶었는데 톰 아저씨는 일하는 아저씨를 부르고 청소하는 아줌마를 부르고. 불과 30여분 만에 내 방의 짐을 뚝딱 옮겨버렸다. 기껏 내가 정리할 것은 화장품과 약들뿐이었는데 손이 느린 나는 그것조차 하루 종일을 걸려 정리를 해낸다.
앞에 살던 사람이 물건을 험하게 썼던지 흰 가죽 소파가 누렇지만 직사광선이 들지 않아 커튼을 열어놓고 소파에 앉아 바깥을 볼 수 있는 건 좀 좋은 것 같다.
원래 쓰던 방보다 바깥경치가 많이 보이지 않는 침실이지만 그 덕분에 커튼을 치지 않고 잠을 자도 될 것 같다.
원래 쓰던 방보다 콘센트 개수가 모자란 침실이지만 눅눅하지 않다.
그럭저럭 나쁜 점들을 좋은 점으로 덮어보려 애를 쓰니 정이 드는 것도 같다.
7년 전 방콕에서의 우기는 여름 하늘에 30분 정도 시원하게 내리는 비가 그치면 다시 여름 하늘이었는데. 그래서 비가 오지 않아도 흐린 날씨가 계속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집을 보러 다닐 때도 내 마음에 드는 집이 우선이었지 춥고 덥고, 비가 새는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귀신같은 솜씨로 불량을 잘 찍어내는 나는 이번에도 불량을 골랐다.
이 맨션에는 나같이 아파트 외벽과 맞닿은 집이 일곱 집은 더 있는데 모두 사람이 살고 있는 중이고, 그 방들 중 비가 새는 집은 없다고 한다. 먼저 방 상태를 보고 싶다고 하던 톰아저씨를 안내해 집에 들어오니 안에 있을 때는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던 곰팡이 냄새가 정말 심하게 났다. 진작 말하지 그랬냐며 미안해하던 톰아저씨는 골치가 좀 아프게 생겼다.
건물 보수를 하려니 돈이 들고 복잡하고, 내버려두자니 방 하나를 놀리는 셈이고. 부실공사의 피해자 톰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