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금요일 오전 11시 01분 - 두번째 수다모임
"저는 말을 잘하게 되고 싶어요."
소란스러웠던 가브리엘의 차례가 끝나자 엘리의 차례가 돌아왔다.
"일을 할 때나 잡담은 잘 하는 거 같은데 집에만 가면 하면 식구들한테 말을 잘 못하겠어요. 아니, 말은 잘 하는데 싸운다거나 하면 받아치질 못하겠어요. 약올라서 어버버하다 끝이 나는 거예요. 그러면 대답 못한 내가 잘못한 사람이 되고요. 나중에는 남자친구하고 말싸움에서도 밀리더라고요. 완전 내 밑에 있는 놈이었는데. 요즘 말 잘하는 사람 진짜 부러워 죽겠어요. 개똥이님, 어쩜 그렇게 말을 잘하세요?"
"엘리님은 말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말을 잘하고 싶으신가요? 제 생각에 엘리님은 충분히 말씀을 잘하는 분 같은데요,"
연마담의 말이 끝나자 나머지 사람들도 동의했다.
"꼭 그런 건 아니고요. 제가 원래 되게 직설적이거든요? 솔직하고요. 그런 게 제 매력이라 생각하고 살았는데 어느 순간 보니까 거울 속에 쭈구리가 하나 있어요. 하고 싶은 말도 잘 못하고 네네 하면서 웃고만 있더라고요. 사람들이 제가 되게 얌전한 줄 알아요. 원래 회사 다녔었는데 회사 생활이 그렇잖아요. 안 된다 보다는 된다 하는 사람들이 더 유능한 사람이고. 네네, 알겠습니다가 입에 붙었죠. 그러면서 매일 매일 속이 타들어가는 거 같았어요. 술도 얼마나 많이 마셨는데요. 일이 적성에 안 맞으니까 맨날 그만두고 싶다 노래를 불렀어요. 그러다 어느 날 건강검진을 했는데 제가 암에 걸린 거예요. 퇴사하고 수술하고 좀 낫자마자 치앙마이 왔거든요. 수술하고 나니 만사 싫은데 식구들은 자꾸만 옆에서 뭐라 그러잖아요."
"뭐라 그러는데요?"
"아파서 어쩌니. 결혼을 빨리해라. 어쩌고저쩌고 그렇게들 말이 많아요. 생각해서 하는 말인 건 아는데 듣기 싫단 말예요. 하도 시끄러워서 생각을 못하겠더라고요. 떠난다고 했더니 이번엔 왜 또 가난한 나라로 가냐는 거예요. 미국이나 영국같이 선진국에 가야 뭐라도 얻어오지 하면서. 귀 막고 뛰쳐나온 거나 다름없이 왔어요."
"남자친구는 뭐라고 안해요?"
"진짜 엄청 쫓아다녀서 제가 만나준거거든요? 진짜예요. 제가 만나준거예요. 처음엔 쭈구리 같더니 약혼하고 나서부터 제가 쭈구리가 됐어요. 자꾸 자기한테 맞추래요. 자기 집에도 맞추래요. 제가 부끄럽나 봐요. 처음엔 엄청 싸웠거든요. 그럴 때마다 어차피 결혼하면 가풍에 맞춰야 할 거 아니냐, 미리 익혀둔다 생각해라 그러잖아요. 그 말을 들으면 다 틀린 말은 아닌 거 같고 저 잘 되라고 하는 말 같기도 하고요. 근데 그러면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거 같잖아요? 내 모습이 하나도 없는데. 올 때 말 안하고 왔어요. 일주일에 한 두번 메일와요. 어디냐 오겠다 그런 내용인데 그냥 됐다고 가야겠다 싶으면 내가 알아서 가겠다고 답장했어요. 아, 속이 시원하더라고요."
"어떤 부분이 속이 시원했나요?"
"어느 순간부터 남자친구가 뭐라 대답할지 뻔하면 그냥 알겠다 하고 입 다물었거든요. 그런데 뭐라 할지 뻔한데도 그냥 내 맘대로 내 알아서 하겠다고 대답해버리니까 속이 시원했어요."
"그럼 엘리님은 앞으로도 속이 시원하기를 바라는거예요? 그런거라면 이미 지금도 잘 하고 계신거 같은데요"
"아뇨, 그런거 아닌데. 뭐라 말해야하지? 음. 저는 결혼을 해야 할지 말아야할지도 잘 모르겠고요. 어쩌면 하기 싫어서 도망온 거 같아요. 남자친구랑 결혼하면 평생을 지적받고 저를 가르치려는 남자랑 살아야 하는데 그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요. 그런데 이제 주위 친구들 결혼한다는 소식이 들리는데 지금 남자친구랑 헤어지면 다른 좋은 남자 만날 수 있을지 아니면 혼자 살아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말이라도 잘해서 남자친구를 데리고 살고 싶으셨던거구나."
연마담과의 질의를 듣던 은하가 무심코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엘리의 목소리가 한톤 높아졌다.
"에에, 그렇게 들으셨어요?"
또 모두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니, 저는 심각하단 말이에요! 선생님, 저 목표 바꿀래요. 결혼을 하냐 마냐 그것이 문제로다로요."
모두 웃는 가운데 엘리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어쩌면 신변잡기 같기도 하죠? 뭐 이런 이야기를 하나 싶을 수도 있고요. 그런데 이게 우리 사는 이야기예요. 그리고 우리가 발담은 현실이기도 하고 우리가 넘고 지나가야 할 산이 되기도 하고요. 여행이건 체류건 이민이건 상관없는거죠. 오늘은 각자의 상담 목표에 대해 이야기하며 간단하게 서로 얘기해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지금 기분이 어떤지 한분씩 돌아가며 얘기해보도록 합시다."
"전 좀 시원해졌어요. 털어놓기만 해도 좀 나아진 거 같아요."
엘리가 말했다.
"저는 더 답답해졌습니다. 이게 뭔가 싶기도 하고. 진짜 이유를 알아낼 수 있을지 초조하고요. 언제쯤 되면 알 수 있을까요?"
가브리엘이 말했다.
"저도 엘리님처럼 앉아있는 것만으로 좀 기분이 나아지는 거 같았어요."
"세상엔 사람 수만큼의 고민이 있다는 말이 진짜일 수도 있구나 싶었어요. 모두 좋아 보이시는데 속에 하나씩 고민을 안고 계시는 모습을 보니까요,"
은하에 이어 마지막으로 내가 말했다.
"그렇지요? 개똥이님 말씀처럼 겉으로 멀쩡해보여도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하나씩은 고민을 안고 살아간답니다. 가브리엘님처럼 빨리 답을 알고 싶어 초조한 마음도 이해할 수 있어요. 괜찮아요. 여기 앉은 분들 모두 다 같은 마음일거예요. 내 것이라고 해서 더 큰 것도 아니고 남의 것이 더 작은 것도 아니에요. 모두 자기에게는 심각한 문제겠지요. 각자 다른 고민을 안고 있지만 이 자리에 모여 함께 고민하고 털어내며 마침내 답을 찾아내시기를 까페 디짜이에서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