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콘타이
카메라는 좀 거추장스럽다. 분명, 있으면 쓰임이 있기는 하지만 그 무게가 주는 부담에 늘 고민하게 된다. 오늘, 뭐 찍을게 있을까? 가지고 갈까, 말까. 오늘은 카메라 없이 외출한 날. 여전히 문을 닫은 단골 국숫집 앞에서 발길을 돌려 센탄 앞마당으로 향한다.
아직 패턴을 익힌건 아니지만,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방문하면 노점이 문을 닫은 경우가 많던데 오늘은 목요일이냐? 그렇다면 나이스라 혼잣말하며 의기양양 출발했으나 예상은 빗나가게 마련. 말끔히 치워진 센탄 앞마당엔 노점 대신 학생들이 바글바글하다. 전통춤을 추고 모금 행사를 하기도 하고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있다. 어디선가 나타난 외국인 무리가 쉴새 없이 셔터를 누르고 있다. 나는 오늘 카메라를 들고 가지 않았는데.
막상 카메라를 들고 간다 치더라도 가장 멋진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많으니 찰나를 잡아내는 능력은 내게 주어진 것이 아닌가 보다. 사실은 구도니 색감이니 담아내는 안목도 꽝이다. 그래도 나중을 생각하면 추억을 반추하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눈에 들어오는 것에 우선 현혹되어버리는 나는 카메라 생각이 났을 때는 이미 가장 멋진 광경은 지나가 버리고 난 후일 때가 부지기수.
차라리 잘됐다, 눈으로 담기 시작하는데 예쁜 전통복을 차려입은 아이들이 행사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맨 무릎을 시멘트 바닥에 대고 복잡한 동작을 하는 모습을 보니 맨살이 짓이겨지는 고통이 전해지는 것만 같아서 내 무릎이 다 아픈 기분이다. 주위 외국인들의 셔터도 바빠지고 아이들도 만족한 표정이다. 모두 만족했으니 쓸데없는 상상력으로 무릎 통증까지 만들어내는 나 하나의 불편함 따위는 아무래도 좋지 아니하겠는가.
허기를 핑계로 이내 자리를 떠서,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싶은 음식을 비싸게 주고 먹고 마사지를 받으러 간다. 항상 입은 옷 그대로 마사지 해주더니 오늘은 갈아입으라고 한다. 안내를 해주는데 시종일관 태국말이다. 그래서 나는 약간 버벅거리고, 약간 실수했지만 결국 옷을 갈아입고 마사지를 받으러 갈 수 있었다.
쾌활한 마사지사는 나에게 자꾸 말을 걸고, 나는 당황해서 자꾸 몸에 힘이 들어간다.
잠시 눈치를 보던 그녀는 큰 소리로 "오, 유 낫 콘타이!(너 태국사람 아니구나)"를 외치더니 주변 마사지사들에게 그것이 큰 소식이라도 되는양 몇 번이나 말을 한다.
넵. 낫 콘타이(태국사람). 아임 콘까올리(한국사람).
방콕에서 태국 사람들이 내게 길을 물어왔을 때는 이미 탈대로 탄 피부와 현지에서 사 입은 옷들로 누가 오해한다 해도 놀랍지 않았는데 지금의 난 아직 덜 탔고, 옷도 한국에서 가져간 거였는데 3주일 만에 콘타이 소리를 들었다. 잘 적응했다, 인증이라도 받은 기분이다. 식당가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들으며 히죽 웃는다.
아홉시. 언제 바꼈는지 모르지만, 감쪽같이 10시 폐점을 지우고 9시 30분으로 시간을 바꿔 달은 출입문 앞에 선다. 비가 온다. 많이. 30분쯤 기다리면 그치겠지 생각하며 비 구경을 한다. 그렇게도 비가 많이 오는데 그 비를 뚫고 가는 사람도 있다. 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을 여상스런 걸음으로 오가는 건물 경비원. 포기한 듯 웃으며 짝을 지어 걸어가는 사람들.
성시경을 귀에 꽂고 비 구경을 한다. 조명 아래서 비를 보면 정말 좋다. 빗소리와 성시경은 절묘한 조합이라 빗소리 때문에 노래가 더 잘 들리고 노래 때문에 빗소리가 더 잘 들린다. 또 히죽거리며 서서 비 구경을 30분.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 노는 의자에 앉아 비 구경. 사람 구경. 한 시간이 지나도 비가 그치질 않는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밤에 큰비가 내렸는데 두 시간 동안 그치지 않고 내렸었다. 기세가 줄지 않는 빗줄기를 보니 아마 이 비도 그런 비인 모양이다. 그럴 줄 알았으면 기다리지 않았을 텐데.
비로소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뒤집어 내용물을 꺼낸다. 자몽 팩 위에 가방을 올리고 그 위에 다른 장본 것들을 채워 넣고 봉지 입구를 단단히 묶는다. 질끈. 눈을 한번 감았다뜨고 빗속으로 나간다. 3미터나 걸었을까.
계단을 내려오니 너무 춥다. 마음이 약해져 썽태우를 탈까 하는데 집까지 60밧을 달란다. 웃는 얼굴로 40밧에 가자고 하니 배짱을 부린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약점으로 삼아 흥정하지 않으려 드는 것이 밉다. 어차피 계단을 내려오면서 쫄딱 다 젖기도 했다. 썽태우가 근처에서 내려준다 해도 집까지는 비를 맞고 걸어가야 한다. 내가 항복하길 바라며 힐끔거리는 썽태우 기사를 지나쳐 과감하게 빗속을 걷는다. 너무나도 추웠다.
괜한 오기를 부린 걸까 순간 후회가 됐지만, 이런 상황이 주어지지 않으면 나는 결코 좋아하는 빗속 걷기를 하지 못할 거다. 입을 꼭 다물어도 빗물이 자꾸 입속으로 들어와 퉤퉤 뱉으며 길을 간다. 숱이 많은 머리카락은 감을 때조차 샤워기로 한참을 적셔줘야 하는데 그 짧은 동안 머리 뿌리까지 흠뻑 젖었다. 첫 1분여가 지나자 빗물은 따뜻해졌다. 비가 내리니 밤길을 걸을 때면 그토록 두려웠던 개도 없다. 지나는 사람도 없고 거리는 조용하고. 세상이 내 것 같다.
배수가 좋지 못해 울컥울컥 물을 토해내는 맨홀을 조심스레 피하며 길을 간다. 물이 발목까지 찬 골목을 걸으며 웃고 또 웃는다. 들떠서 까불다가 이어폰을 물에 빠트렸는데도 다행히 작동해줘서 성시경은 끝도 없이 내게 노래를 불러주는 밤이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항상 우산을 챙겨주던 경비아저씨는 홀딱 젖은 나를 보면서 웃는다. 나도 웃는다.
몸에서 떨어지는 물에 복도가 물바다가 될 게 좀 신경 쓰이지만 수건을 찾으러 갔던 아저씨가 빈손으로 돌아와 그냥 올라가도 된다고 해서 인사하고 올라가는 길. 톰아저씨와 계단에서 만났다. 비가 많이 오는데 내가 집에 없다고 해서 걱정했다고 한다. 몇 번이나 전화 걸었는데 왜 받지 않았냐고 묻는다. 전화기는 비에 젖지 않도록 가방과 함께 비닐봉지에 꽁꽁 넣어둔 터라 전화 오는 걸 알아도 받지 못했는데 톰아저씨의 전화였구나. 다음부터는 비가 오면 꼭 전화하라며 방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감기약이 없으면 하나 주겠다고 하는데 나도 약은 많이 있다고 말하고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감기에 강하다. 의외지만 다른 걸로는 비실거려도 비정도 맞는다고 해서 감기에 걸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약은 먹지 않았다. 이것은 톰아저씨에게는 비밀이다.
벼르고 별렀던 비를 맞았다는 것.
태국사람이냐는 얘기를 들었던 것.
자꾸만 기분이 붕 뜨는 밤이다.
오늘 꼭, 생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