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 해 줘서 고마워
장을 보러 갔는데 누군가 나에게 서툰 한국말로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해왔다. 아직 이곳에서는 나를 만나 인사를 해 올 태국인 친구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으레 그렇듯 눈을 살짝 내리깔고 재빠른 걸음으로 그를 피해가려고 했다. 마침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으니 내가 못 듣고 지나갔다고 해서 무례한 것도 아니지 않겠는가.
그렇게 외면하고 돌아선 뒤통수에 꽂히는 "Do you remember me?" 이쯤이면 고개가 절로 돌아간다. 눈을 마주하고 빤히 쳐다봐도 나는 그를 모른다. "Y.M.C.A.!!" 한마디 한마디를 강하게 끊어 말하는 그의 말을 듣고 생각났다. YMCA에서 만난 사람 중 나에게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건넨 건 한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태국어 수업을 마치고 내려오던 어느 날, 그날따라 복도에는 사람이 많았고 함께 내려오던 로나는 우리보다 더 높은 레벨을 듣는 웨스턴 할아버지들과 눈이 맞아버렸다. 본의 아니게 나는 덩치 큰 남자들 틈에 낀 키 작은 여자애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복도를 지나던 나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넨 그.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어색한 자리도 아니었건만 왠지 그의 "안녕하세요!"를 들으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밝아진 마음에 웃으며 "안녕하세요!" 인사하고는 몇 마디 건네고 돌아섰는데 나는 그가 YMCA의 직원이라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는 기억하되 그는 잊었다.
다시 만난 그는 한국어 수업을 들은 지 한 달 되는 학생이라고 했다. 한국말이 매우 어렵다고도 했다. 그래서 나도 태국어 수업을 들은 지 한 달 되었는데 태국말이 몹시 어렵다고 답했다. 길게 말을 잇지 않은 그는 YMCA에서 다시 보자며 쿨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는데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한국인이라는건 어떻게 알았는지도 물어보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YMCA에서 마주하는 모든 동양인에게 "안녕하세요!"를 외쳤는지도 모른다.
며칠 전 백화점 앞에서 썽태우를 탔는데 대략 열 번에 한 번꼴로 걸리는 돌아돌아가는 썽태우를 잡아타게 되었다. 30분 가량 님만해민근처를 빙빙 도는 썽태우에 실려 맞은편에 앉은 남자애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열일곱이나 되었을까, 앳되어보이던 그는 치앙마이 대학의 학생이라고 했는데 입성이 아주 번듯했다. 보통은 차를 가지고 다니는데 오늘은 아버지에게 차를 빼앗겼다며 비보잉 연습을 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다섯 시까지 가야 하는데 지금은 일곱 시라며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그를 보며 웃고, 이야기를 나눴다.
평범하고도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눈을 반짝이며 그가 "You so lovely."라고 말했을 때 나는 웃으며 "You, too."라고 대답했는데 "I know"라고 돌아온 대답에 한참을 웃었다. 전화기를 들고 한참을 만지작거리던 그의 모습에 그가 바라는 것을 알았지만 모른척했다. 센탄 근처에서 멈춰서선 우리집까지 가지 않겠다며 걸어가라고 하던 썽태우 기사에게 20밧을 주고 내리는 길 그 애는 나를 따라 내려야 할지 친구들이 기다리는 연습장으로 가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나를 내려놓은 썽태우가 출발하고, 나의 등에 던져진 그의 외침.
"I love you!!"
너, 따라 내릴 정도의 마음도 없으면서 너무 쉽게 사랑을 남발하는 거 아니야?
가장 어중간한 곳에서 나를 내려놓은 썽태우 기사를 원망하며 나의 관심은 저기 멀리서 나를 향해 걸어오는 덩치 큰 개에게 향해 있었다.
보통 나는 그런 기억을 별로 유쾌하게 간직하는 편은 못 되는데 그날의 경험은 어쩐지 피식, 웃음 나는 구석이 있다. 그토록 담백한 고백은 처음 들어봤다.
사랑이 어려운 것이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웃음기 쪽 빼고 정색한 진심만 담겨야 진실이라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사랑은, 고난 따위가 감히 범접해 올 수 없는 행복으로만 가득 차 있어야 한다고도 생각했었다. 웃지도 않으면서 행복을 논하다니, 그때의 나는 틀렸다.
그래서 '나는 사랑에 빠졌는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었다. 때로는 '행복하지 않은데, 사랑하는 게 맞을까?'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었다. 출발이 틀렸는데 그걸 모르니 고치질 못했다. 이유는 자꾸 만들어 아무것이나 갖다 댈 수 있었지만, 현실이 바뀌지는 않았다.
불타는 연애에 대한 동경이 사그라들고 더는 그런 것들이 나에게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사랑을 갈망했다. 비좁은 마음에, 어떻게 그런 이중적인 생각이 가능했는지는 모르겠다.
치앙마이에 온 후 매일매일의 생활이 알차다. 헛되이 보내는 하루가 없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보며 매일이 새롭다. 다른 시각을 배우고, 다른 눈으로 본다. 어쩌면 나는 조금 성장하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사랑.
이제 잘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담백하게.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