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5일 금요일 오전 10시55분 네 번째 수다모임(3)
“저는 지난번 얘기했지만 딸만 둘인 집의 막내예요. 언니하고는 한 살 차이고요.”
“아, 저도 그래요. 저는 장녀고요.”
엘리의 말에 내가 답했다.
“그래요? 정말 신기하네요, 개똥이님. 같은 자매에 연년생이라니. 저희 부모님은 어려서부터 저희를 독립성 있는 사람으로 키우려고 하셨어요. 여자라서 안 돼 뭐 이런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않았고 생각해보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같이 키워도 언니는 늘 성과가 좋았고 저는 성과가 나빴어요. 아니 보통 정도는 됐는데 언니하고 비교하면 늘 턱없이 부족한 거죠. 부모님은 저하고 언니를 비교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늘 잘하는 장녀와 늘 부족한 막내라는 고정관념은 있었어요. 학교 가면 선생님들이 제 이름보다는 누구 동생으로 알았어요. 가끔 언니는 잘하는데 너는 왜 그러냐는 말을 듣기도 했고요. 언니만큼 하라는 사람은 없었는데 언니처럼 하라는 분위기는 있었던 것 같아요. 저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엘리가 말을 멈췄다. 큰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이내 빠르게 다시 말을 이어갔다.
“언니는 착해요. 아니, 엄마 아빠가 언니더러 착하대요. 생각해보세요. 공부도 잘하고 생활도 착실한데 사람이 착하기까지 해요. 어떻게 엄마 아빠가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그런데 저는 진짜 모르겠거든요? 저는 저만이 언니의 가식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언니가 웃어도 웃는 것 같지 않고 울어도 우는 것 같지 않아요. 아니, 애초에 우리 언니는 우는 사람도 아니에요. 늘 웃고 있죠. 대체 진심이 없는 사람이에요.”
엘리는 몹시 억울해 보였다.
“엘리님은 언니의 어떤 면이 가식이라고 보여요?”
내가 물어봤다.
“그러니까요! 개똥이님, 제가 개똥이 님만큼의 말솜씨만 있어도 정확한 단어를 찍어서 설명할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분명 저는 보여요. 느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 말을 하면 저만 삐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어요. 진짜 미치고 팔짝 뛰겠다니까요. 아, 맞다. 우리 언니는 친구가 많이 없어요. 대학 졸업한 지 2년밖에 안 지나 결혼을 했는데도 회사 동료들은 왔지만 친구는 얼마 없었거든요. 그때 언니가 하객 알바를 고용할까 고민까지 하는 걸 들었어요. 언니가 진짜 그렇게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면 주위에 그렇게 친구가 없을 수가 있어요?”
엘리가 빨개진 두 뺨에 손을 가져다 대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볼에 손을 가져다 대는 신체의 신호는 어떤 의미일까.
“언니가 그런 걱정을 엘리님에게 상의했어요?”
연마담이 물었다.
“아뇨. 엄마한테 말하는 중이었는데 제가 주방에 갔다가 얘기를 들은 거예요.”
“그 얘기를 듣고 엘리님은 뭐라 반응했나요?”
“완전 비웃었죠. 어떻게 살았길래 결혼식 올 친구도 제대로 없냐고요. 없으면 없는 대로 할 것이지 허세는 들어가지고 하객 알바는 또 뭔 소리냐고도 했어요.”
“언니는 엘리님의 말을 듣고 뭐라 하던가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아, 뭐라고 한마디는 한 거 같은데 잘 기억은 안 나네요. 뭐 어쩔 수 없다 라던가 그렇게라도 할 수 밖에 없는 심정을 아냐? 그거 아니면 나 아니어도 요즘 그렇게 하는 사람도 많다더라 같은 류의 말이었던 것 같아요. 원래 언니는 별거 아니에요. 오히려 엄마가 난리죠.”
“엄마가 뭐라 하셨는데요?”
“언니가 공부만 하다 보니 친구가 많이 없다고요. 숫기가 없어서 그렇다고요. 동생이 되어서 꼭 그렇게 말을 해야 하냐고요. 니 그 많은 친구라도 데려와서 좀 채워줄 생각이나 하라고요. 저보고 마음 심보가 글렀대요.”
“엘리님은 친구가 많은 모양이네요.”
내가 말했다. 나도 친구가 많이 없다. 그래서 내 결혼식에도 친구가 적었다.
“네.”
대답하는 엘리의 표정이 자랑스러워 보였다.
“오늘은 가브리엘님의 이야기를 듣느라 시간을 많이 썼습니다.”
연마담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가브리엘이 말했다. 늘 상기된 인상의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낯선 표정이다.
“아닙니다. 탓하려는 게 아니라, 이런 날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지난주는 개똥이님 이야기에 은하님 이야기까지 더해서 상담 시간이 한 시간 가까이 오버 되었답니다. 모임을 하다 보면 그런 날도 있어요. 중요한 부분이라 자르고 다음에 합시다, 말할 수가 없는 그런 날요. 매번 한 사람만을 위한 수다 모임이 되면 곤란하겠지만 오늘은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던 가브리엘님을 위해 우리가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 가브리엘님의 사연에 귀를 기울여 보았습니다. 한번 털어놨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브리엘님을 생각하는 저희의 마음을 가브리엘님이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으면 좋겠네요.”
가브리엘이 두어 번 주억거렸다.
“좋습니다. 오늘, 지금 기분에 대해 말해 볼까요? 오늘은 특별히 색깔로 말을 해봅시다. 오늘의 기분은 어떤 색깔인가요?”
“핑크요!”
갈색 페디큐어를 바른 발을 까딱이며 엘리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저 원래 핑크색을 제일 좋아하거든요.”
“좋아요. 엘리님은 핑크한 기분이시랍니다. 다른 분들은요?”
“저는 갈색요. 엘리님 발만 보여요.”
나의 대답에 모두들 엘리의 하얀 발을 보며 웃었다. 엘리가 얼른 구두를 끌어당겨 신었다.
“저는 민트색요. 민트색이 신경 안정 역할을 한다고 어디선가 들은 거 같아요.”
은하가 말했다.
“파랑색요. 어두운 파랑. 사실은 아직 좀 우울합니다.”
가브리엘이 말했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도 우리 수다 모임에 많은 진전이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갑작스러운 전개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바라마지않던 순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서 말했듯 오늘은 가브리엘님의 말씀을 많이 듣느라 은하님과 개똥이님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어때요, 다음 주는 이야기 예약제로 해볼까요? 듣고 싶은 사람 이야기 있어요?”
윤마담의 이야기가 끝나자 내가 은하님요,하고 말했다. 은하님은 아니, 난 할 말이 없는데 하고 말했지만 딱히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좋습니다. 다음 주는 은하님의 이야기를 우선적으로 들어보는 것으로 예약을 해두겠습니다. 은하님, 오셔서 생각나는 이야기를 하셔도 좋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미리 생각을 정리해오셔도 좋습니다. 모두 성의껏 귀 기울일 것을 약속합니다. 그렇지요, 여러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야깃거리 만든다고 억지로 부부싸움하고 오지는 말고요. 그렇게 안 해도 제가 은하님 살살 잘 꼬드겨서 술술 이야기 풀어내게 할게요. 저 그런 거 잘해요.”
어딘지 익살스러운 연마담의 표정에 은하의 굳은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부담스러웠던가 보다.
“오늘 저의 기분은 블루입니다. 가브리엘님과는 달리 파란 하늘의 블루입니다. 오늘 한 분도 빠짐없이 모임에 참석해주심에 감사하고 가브리엘님께서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주신 모습이 대견하고 가브리엘님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적절한 질문을 던져주는 여러분의 성숙한 모습에 감동 받았습니다. 약간 비가 올 것 같이 흐린 하늘이지만 저의 기분은 파란 하늘입니다. 돌아가시는 길 각자의 마음으로 하늘을 그려보시길 바랍니다. 뭉게구름 떠 있는 포근하고 평온한 귀갓길 되시길 까페 디짜이에서 기도하겠습니다. 이것으로 오늘 모임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