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여행자-사람이 떠나간 자리
"게스트하우스에 맡겨둔 제 세탁물 좀 보관해 주시겠어요? 뭔가 두고 가는 게 있으면 왠지 다시 오게 될 것 같아서요." 담백한 말이었지만 왠지 쑥스러워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맨션에 사는 이웃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나온 그녀의 얘기. 사람이 떠난 자리가 섭섭하다고 하니 뭘 그런데 다 정을 들이고 그러냐는 대답이 돌아온다. 오가는 사람 모두에게 정을 줄 수는 없다는 의미의 말이라는 건 알았지만 어떻게 눈 마주치고 얘기하고 밥을 먹고. 함께 여행했던 사람에게 정이 들지 않을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녀가 떠나던 날 아침까지 깨어있으면서 편지를 한 장 쓰고 싶었다. 좋아한다는 만아오(라임) 원액을 하나 사서 손편지 한 장과 함께 주며 배웅하고 싶었다. 그러나 용기가 나질 않았다. 너무 이른 시간 출발이라 썽태우를 잘 잡을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공항까지 잘 도착했나 보다. 설핏 잠이 들었는데 전화가 걸려와 깼다.
8일의 시간. 치앙라이에 갔던 것을 제외하면 5일 정도 얼굴을 봤다. 4일 정도 함께 여행을 다녔다. 정돈된 모습이 낯설었던 사람이 4일 만에 참으로 다른 존재가 되어있었다. 돌아간 삶에서 무엇이 그녀를 기다릴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처음 봤을 때 어깨에 쌓여있던 빛바랜 먼지가 눈에 띄게 치앙마이의 바람에 실려 날아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여행은 괜찮은 여행이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괜찮은 동반자이지 않았겠는가. 칭찬해주는 이 없이 만족해본다.
치앙마이의 하늘 반쪽에는 그늘이, 나머지 반쪽에는 햇볕이 내리쬐는 신기한 요일. 메일을 한 통 받았다. 그녀가 떠난 후 잠을 설치며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적어 보냈던 메일의 답장이다. 사뭇 거창할 수도 있고 사뭇 처량할 수도 있는 말들을 그녀는 담담하게 풀어간다. 그래. 그런 사람이다.
빨래를 맡아달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쪽지를 남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게스트하우스에 빨래를 맡기며 당부 글을 남긴 건가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메일을 읽다 보니 나에게 남긴 것이라고 한다. 장사하는 곳이니만큼 그 빨래를 오래 맡아두고 있을 거라 생각하기는 힘들어 언제고 가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쪽지 이야기를 들으니 가만있을 수가 없다. 궁금하다.
부랴부랴 채비를 하고 길을 나섰는데 생각보다 발길이 가볍다. 빨래를 찾으러 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받아오면서 마음이 너무 서글프면 어쩌나 내 마음이 걱정되어 쉬이 나서지 못했는데 두고 간 것보다 남기고 간 것에 관심이 쏠리면서 그 길이 기껍다.
그녀가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아직 빨래를 찾아두지 않았다며 직접 찾으러 가라면서 그녀가 내게 남긴 봉투를 내밀었다. 세탁소에 가서는 영수증을 못 찾아 작은 소란 끝에 그녀가 남기고 간 봉투 속 선물 포장 뒷면에서 끄집어낼 수 있었다. 빨래를 찾고 나자 갑자기 하루 치의 피곤이 몰려온다. 아마도 긴장했었나 보다.
허기를 해결할 곳을 찾아 동네를 기웃거리다 눈에 띈 홍토(Hong Tauw). 님만해민 로드 초입에 위치한지라 님만해민에 갈 때면 몇 번이나 그 앞을 지나다니면서 봐도 식당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여행 오기 전에 자료를 찾아보면서 저곳이 유명한 식당이라는 걸 알게 됐다던 그녀의 얘기를 듣고 나중에 같이 가봐요. 하고 이야기했지만 5일의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식당은 누군가가 내게 남기고 간 것을 음미하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망설임도 잠시. 이내 포장을 벗겨내기 시작한다. 언니라고 불러도 괜찮죠? 로 시작하는 예쁜 손글씨. 예쁜 마음. 즐거웠던 여행에 대한 기억. 남을 나에 대한 걱정. 함께했던 시간에의 감사. 내가 적은 글 속 자신을 보며 공항 라운지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던 그녀의 고백처럼 나도 텅 빈 식당에 앉아 그녀의 쪽지 속 나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가지고는 왔으되 읽지는 못했다던 책을 선물로 주고 갔는데 생텍쥐페리의 우연한 여행자다. 어쩌면 그렇게도 마침한 제목이 있는지. 책을 좋아하면서도 어느 순간 단 한자도 읽지 않게 되어버린 내게 가장 좋은 선물을 남기고 떠난 그녀. 첫 페이지에 포스트잇으로 적은 짧은 메모를 읽으며 언젠가 떠날 여행에서 꼭 이 책을 읽으리라 마음먹는다.
정말 맛있는 만아오는 먹어보지 못하고 떠난 그녀. 여기 만아오, 양은 적지만 정말 맛있는데. 생각보다 음식 운이 따라주지 못했던 여행이라 아쉬움이 많다.
다시 오면.
그때는 내가 여기저기 많이 찾아 함께 다닐 수 있을 텐데.
꼭, 여기일 필요는 없겠지.
식사를 끝내고 나오니 하늘 위로 비행기가 지나간다. 저공비행으로 선명하게 드러난 비행기의 배를 쳐다보고 있자니 눈 깜짝할 사이에 멀어져간다. 카메라 생각이 났을 땐 이미 저 멀리 가고 있다. 무언가 애틋함을 담아 한동안 저기 가는 비행기를 바라본다. 한국에서는 비행기만 보면 나를 데리고 가라며 그렇게 아쉬워했는데 이제 나는 여유를 가지고 떠나는 비행기를 배웅한다.
잘 가요.
나도 이제 여운이 긴 이 여행의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