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페 디짜이(25) - 새벽 안개의 환상, 뿌삥 궁전

새벽 안개의 환상, 뿌삥 궁전

by 서화림

뿌삥 궁전에 갔다가 점심 먹고, 싼캄팽엘 가자. 저녁에는 도이수텝에 올라 노을을 보는 거야. 거창하지도 않은 계획이었지만 짜여진 하루를 보내는 것은 어쩐지 특별하게 느껴졌다. 안개가 낀 뿌삥을 꼭 봐야 한다 우겨서 까페 디짜이에 부탁해 차까지 렌트했는데 막상 기사는 약속된 시간을 훌쩍 넘겨도 소식이 없다. 애초에 여덟 시 약속이라는 것에서 이미 아침의 궁전은 물 건너간 거다. 안개의 뿌삥을 보지 못한 것에 다소 삐뚤어져 있던 나는 조바심을 내는 남편에게 ‘태국인 타임’이라며 기다리면 된다 무성의하게 말한다.


얇은 원피스 한 장 입고 있던 내게 아침 날씨는 쌀쌀했고 기사는 오지 않자 남편은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라며 나를 쫓아냈다. 그리고 덧붙이는 한마디. “차량 예약한 데 전화번호 알아와!” 생활력과 체력을 무한대로 갖춘 배낭여행에 최적화된 그는 치앙마이에 와서는 도통 움직이려 들질 않는다. 식당에 가서도 시켜야 계산서를 집어 들고 누군가에게 뭔가 물어볼 때도 먼저 나서지 않는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다. ‘예약했으니 오겠지’하는 내가 나다운 것이라면 관련 전화번호 서너 개쯤은 미리 확보하고 있는 것이 '그'다운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컴퓨터를 켠다. 그런데 또 인터넷이 먹통이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까페 디짜이로 뛰어가 업체 전화번호를 알아와야 할까? 고민하는 도중 걸려온 전화. 집 앞 골목에 운전자 없이 덩그러니 주차되어 있던 그 차가 바로 오늘 우리가 타고 다닐 차였다고 한다. 그저 만나지 못한 것일 뿐, 늦은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영어가 서투른 그의 이름은 ‘능’. 태국말로 숫자 1이라는 뜻이니 그는 그 부모의 첫 번째 아이기라도 한 걸까. 어려 보이는 외모의 그였지만, 나이를 물어보는 남편에게 그는 강한 악센트로 “트웬티 식스”라고 답했다. 스물여섯의 청년 능은 벌써 아기까지 있는 가정의 어엿한 가장이니 나이만 많은 우리보다 더 어른인 셈이다.


첫 번째 목적지는 뿌삥 궁전이었다. 예전 도이수텝에 갈 때처럼 울렁거리는 속을 도저히 못 참겠다 싶을 때쯤 도착한 뿌삥 궁전. 절이 아님에도 반바지 입장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에 잠시 투덜, 그러나 재빨리 내민 이십 밧과 맞바꾼 긴 바지. 비록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기는 하지만, 어쨌든 주인 있는 집에 들어가면서 주인이 싫다고 하면 안 하는 게 맞는 거겠지, 나름의 합리화를 해본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사람 손이 많이 닿은 자연은 다소 인위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그 넓은 곳 모두를 관리 할 수는 없기에, 그리고 자연이라는 그 자체가 가진 조화로운 기운이 있었기에 나는 금세 그곳이 좋아졌다.


왕족이 머무는 날에는 입구 입장조차 금지된다고 듣기는 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머물지 않는데 궁전 건물 앞에서 서성이며 계단참을 청소하는 사람들만 눈에 담고 돌아서야 하는 것은 김새는 일이기는 했다. 어쨌든 이곳은 ‘궁전’이지 않은가. 궁전에 왔다면 궁을 봐야지. 건물 근처로 다가가면 안 된다던 근엄한 군인 아저씨는 사진은 찍어도 되고 다음은 어디로 가면 볼거리가 있다며 자상하기도 했다. 사람이 자주 머물지도 않는 저곳을 그들은 매일, 저렇게 충실히 지키고 열심히 청소하는 걸까.


궁전을 포기하자 누릴 것이 늘어났다. 나지막한 돌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길은 즐거웠다. 필시 신경을 많이 썼을 테지만, 그래도 줄짓지 않고 자연스럽게 심어놓은 작은 꽃을 보는 것도, 야트막한 시냇물도, 이제는 이곳을 방문하는 누구도 앉고 싶어 하지 않을 이끼가 가득 껴버린 통나무 벤치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이제 왕족의 피서지에 대한 관음증 따위는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참으로 멋진 곳을 방문하게 되었지 않은가. 좋은 날이다.


입장하며 궁 내 지도를 받아들기는 했지만 일단 한 방향으로 출발했다면 길을 따라 앞으로 진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로가 된다. 생각보다 큰 규모에 놀라며 아침 산책은 계속된다. 갑작스레 나타난 평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건물. 맞은편에 놓인 커다란 어항에는 ‘살라맨더’라는 이름과 종 특성이 설명되어 있다. 어항 모서리를 끼고 한 바퀴를 둘러 봐도 집주인은 보이질 않는다.


마침내 찾아낸 남편 덕분에 처음으로 보게 된 살라맨더. 여태 나는 그것이 불을 뿜는 상상의 동물이라 믿고 있었다(정보라는 것은 선택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멋스럽게 꾸며진 그의 보금자리에는 깨끗한 물이 가득 있었고 우리가 만들어낸 그림자에 놀란 살라맨더는 물속으로 숨어버린다. 불을 뿜지 못하는 너는 그냥, 발바닥이 귀여운 도마뱀이다. 안녕,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난다. 안녕안녕. 또 만나자.


그리고 분수가 있다는 호수에 가보기로 한다. 너무 많은 계단에 지레 겁을 먹었지만 공기가 좋아서일까 등을 밀어주는 사람이 있어서일까. 가벼운 발걸음으로 올라간 길, 분수는 역동적이다. 연신 수면을 갈겨대는 세찬 물소리는 자극적이었지만, 흩날리는 물줄기를 바라보는 것은 즐거웠다. 음악 없이도 음악을 듣고 있는 것만 같은 리듬감. 저 분수, 마음에 든다.


산이라 해는 일찍 떴는데 기온이 올라가질 않는다. 물가라 더 추운 거라며 호수 귀퉁이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따뜻한 거라도 마시자며 몰려간다. 잘 관리되었다는 인상 정도, 특별할 것 없던 호수 주변은 막상 거닐어보자 또 다르다. 좋아하는 코스모스를 태국에서도 볼 수 있어 기뻤고, 조심조심 건너간 잔디밭 너머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치앙마이 풍광도 좋았다.


그러다 나비, 나비를 발견했다. 선명한 보라색 꽃 위에 내려앉은 날개가 멋진 나비. 감히 다가갈 엄두도 못 내고 그 우아한 날갯짓을 쳐다만 보고 있는데 뭐해, 얼른 찍어야지 남편의 응원이 뒤따른다. 혹시나 날아갈까 조심조심 움직이는데 다행히 나비는 나를 위협 인물로 간주하지 않았나 보다. 가까이 다가가도 가만히 있더니 한참을 더 쉬고서야 자리를 뜬다. 나도 참았던 숨을 몰아쉰다.


카페테리아는 추웠다. 직원 아가씨는 퉁명스럽고, 오전 10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영업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하는 통에 남편은 눈앞에 준비되어있는 차옌을 주문해버렸다. 추운 날씨. 얼음이 가득 든 밀크티를 마시며 그는 웃었다. 나는 남편을 채근해 감자튀김을 사 오도록 했고, 기름을 잔뜩 머금은 미지근한 감자튀김을 오렌지 주스와 마시며 여기 되게 비싸다, 맛이 없다, 아가씨는 불친절하다, 흉보다 머쓱해져 그만 웃어버렸다.


이제 절반 정도 둘러본 것에 불과했지만 돌아서야만 한다. 이미 입장한 지 두 시간이 넘어가고 있었고 오늘 하루만큼은 시간을 계획적으로 써야만 한다. 체력적으로도 무리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돌아서는데도 아쉬움이 남는다.


운무가 멋진 곳이라기에 기대가 컸던 뿌삥. 그 외 기대가 있었던 곳은 아니었다.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어 다소 시큰둥하게 출발하게 된 그곳은 다행히도 좋은 곳이었다. 사람의 마음이 많이 담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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