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페 디짜이(29) - 헬로, 스트레인저(2)

헬로, 스트레인저(2)

by 서화림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전날 일찍부터 잠들어 깨지 않고 내리 잔 덕이지만 그래도 이른 시간의 기상은 내게 생소한 일이다. 옆 침대의 련은 아직 자고 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내게 부담스럽지 않은 룸메이트다.


새벽 시간은 습하고 춥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빠이에 가면서 전기를 꽂아 쓰는 핫팩을 가져갔다. 수면 양말도 챙겨왔다. 처음 치앙마이에 갈 때 30kg짜리 가방을 싸며 전기 핫팩은 단일 품목으로는 가장 무게를 많이 차지하는 물건이었다. 꼭 챙겨야 하는지 고민하는 나를 무시하고 가방에 욱여넣던 남편에게 이제야 고마운 마음이 든다.


침대 밖으로 련의 발이 튀어나와 있다. 체구가 작은 그녀는 잠버릇은 꽤 거창한 편이다. 동남아로 여행 오며 추위 대비는 미처 하지 못했던 련은 내가 준 수면 양말을 신고 잠이 들었다. 창 옆자리가 춥진 않았을까. 어젯밤은 제법 쌀쌀해 핫팩을 혼자만 쓰는 게 미안했다.


동그란 얼굴에 쌍꺼풀 없이 찢어진 긴 눈 납작한 코. 전형적인 동양인의 얼굴로 묘사될 생김새지만 처음 봤을 때 한국 사람이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여기가 한국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며칠 사이 부쩍 친근해진 그녀를 본다. 이렇게 정이 들었다.


잠든 그녀를 보며 상상해본다. 공부 잘하는 련. 국제 봉사 동아리에서 활약하는 련. 이 취업난 속에서 졸업을 늦춰가며 세계여행을 다니며 세상 공부를 하는 련. 스스로 세운 인생 계획을 실행에도 옮길 줄 아는 당차고 용감한 련. 그리고 그녀를 뒤에서 받쳐 주고 있는 든든한 가족을 그녀의 모습 위에 덧씌워 본다. 살금살금 다가가 옆으로 밀려난 이불을 덮어준다. 그녀는 나와 달리 추위를 많이 타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이불을 덮어주며 살짝 스친 팔이 따뜻하다. 다행이다. 잠든 얼굴을 보니 새삼스레 맑은 얼굴이다.


련이 일행이 있음을 말했을 때 나는 어렵지 않게 그녀의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룸메이트에요(일행은 아니에요). 그래서 나도 만나야 할 사람이 있음을 허둥지둥 말했다. 단지 같은 방을 쓰고 있다는 이유로 외출을 할 때마다 눈치를 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한 번이나 두 번쯤은 식사를 함께할 수도 있을 테고 관광지를 둘러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일정 내내 함께 하는 상대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도 나도 같았다. 3일 일정으로 온 빠이를 둘러보기 위해 종일 분주할 그녀와 그 동행들의 걸음은 나의 느린 시간과 맞지 않다. 그것을 억지로 섞으려 들지 않아 우리는 좋은 관계일 수 있었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그녀는 내게 일과를 얘기해 주었고 만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나는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상상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리고 나도 내 느린 시간에 대해 얘기했다. 그녀는 주로 무엇을 보았는가에 대해, 나는 주로 무엇을 느꼈는가에 대해 나누었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각자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 어렵지 않은 시간이었다. 충분히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로의 하루를 평가하지 않는 여행 이야기가 끝이 나면 우리는 개인사를 조금씩 털어놓곤 했다.


련은 서울대 출신이란다. 그녀는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무척 조심스러워했다. 학벌이 좋은 것, 원하는 조건과 시간에 맞춰 취업을 결정했다는 것. 단지 자신의 삶을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타인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스물여섯 여자애가 웃고 있다. 언제까지나 삶의 멘토는 할머니라며 여행깨나 다닌 축에 속하는 자신도 아직 할머니의 기록을 깨지는 못했단다. 지금도 여행을 떠나기 전 할머니에게 여행지 이야기와 정보를 얻곤 한다며 더 밝게 웃는다. 세계여행을 다니는 할머니라. 나이가 더 든다면, 그래서 나에게도 자식과, 자식의 자식이 생긴다면 멘토 할머니라 불릴 수 있을까 나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엄마와의 약속으로 들르는 여행지마다 엽서를 보내는 것을 여행의 전리품으로 삼는다던 련은 야시장에서 사 왔다는 엽서를 앞에 두고 잠시 고민하더니 곧 뭔가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나는 동그란 등을 쳐다보며 엽서의 내용을 궁금해한다. 저 손바닥만 한 엽서에 어떤 크기의 마음을 담아낼 수 있을까. 해보면 늘어요! 저도 처음엔 어색했어요. 무심하게 명쾌한 대답을 내놓는 련. 나도 누군가에게 엽서를 쓰고 싶은 광경이다.


남편이 떠올랐다. 지금쯤 베트남의 오지에서 낯선 말과 사람들에 둘러싸여 내 생각 따위 할 틈 없이 바쁠 남편. 그에게 엽서를 쓰고 싶다. 엽서를 받으면 기뻐할 테지만 정작 뭐라 써야 할지 모르겠다. 머릿속으로 엽서를 쓰는 내 모습을 그려본다. 보고 싶어요. 그 외 어떤 말을 더 채워 넣을 수 있을까. 남편을 제하니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도 없다. 나는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남편을 채워 넣고 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남편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잔털이 숭숭한 그의 손을 잡고 싶다.


언니, 이거 보세요. 엄마한테 쓴 건 이렇게 듬성듬성 글씨가 큰데 남자친구 거는 완전 빽빽하죠? 잉크를 말린다며 엽서로 부채질을 하던 그녀가 자신의 엽서를 내밀었을 때 나는 더 이상 엽서 속 내용이 궁금하지 않았다. 엽서 두 장을 번갈아 보며 그녀가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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