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5일 오전 열시 오십분 일곱 번째 수다모임(1)
수다모임 일정이 없었더라면 아직 빠이의 늪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임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고 결석하고 싶지 않았다. 헤어나올 때가 되지 않았음을 알기에 나는 짐을 꾸리지 않고 다시 치앙마이로 돌아왔다. 몸통만 한 짐을 짊어지고 떠났던 내가 외출하듯 가벼운 옆 가방 하나만 들고 맨션으로 들어서자 톰아저씨는 맨발로 뛰어나와 연신 아유 오케이를 외쳐 댔다.
그는 내가 수다모임에 참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영어 아니라 한국어로 말한다 치더라도 그 모임에 대해 뭐라 설명해야 좋을지 몰랐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두 시간짜리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여행 중간에 집에 돌아왔다고, 그리고 곧 다시 갈 것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모임이 대체 무엇이길래 762번의 꼬불길을 타고 치앙마이로 돌아오게 하는지 당장 나부터도 설명할 수 없는데.
멀미로 지친 몸을 쉬고 싶었지만 잠이 오지 않아 또 뜬눈으로 밤을 샜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면 짐 정리건 빨래건 해야 할 일이라도 있을 텐데 짐은 아직 빠이의 내 집, 반 쑤언 빌리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어서 빨리 해가 뜨고 상담이 끝났으면 좋겠다. 돌아갈 수 있도록. 끝내러 갈 수 있도록. 밤이 길다.
“오늘은 짝을 바꿔보죠.”
연마담의 말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짝을 정한다. 나와 가브리엘, 엘리와 은하.
“안녕하세요.”
새삼스럽게 가브리엘에게 인사를 건넨다. 가벼운 목례 정도를 제외하고 그에게 말로 인사를 하는 건 처음이다. 그도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받아준다. 곧 짧은 근황 토크가 시작되었다.
“개똥이님은 빠이에서 어젯밤에 돌아오셨답니다. 아는 사람은 아니고, 글을 무지하게 잘 쓰는 블로그 이웃이 있대요. 이 사람이 빠이에 왔는데 외롭다고 신세타령 하는 글을 썼다네요. 글쎄 개똥이님이 그걸 보고 냅다 출발하셨다는거 아닙니까. 개똥이님이 보기보다 기분파네요. 저 오랜만에 감동 받았어요. 빠이 가선 만나려던 사람도 만났지만 모르는 사람들하고도 말도 섞어보고 떠나는 사람들 배웅도 하면서 많이 서운하셨대요. 저도 그 기분 알죠. 친해진 사람도 아니고 좋아하게 된 사람도 아니었는데도 막상 간다 하면 서운하고 가는 거 보며 기분 안 좋은 거. 그렇다고 오래가는 서운함도 아니지만 암튼 그 순간엔 마음이 무겁죠. 더 계시고 싶었는데 상담 때문에 중간에 몸만 오셨대요. 저 같으면 한번 빠지고 계속 있었을 거 같은데 진짜 성실하시네요. 끝나고 바로 다시 가신다는데 개똥이님하고 얘기하면서 저도 여행 가고 싶어졌습니다. 아, 개똥이님 따라 빠이로 갈까?”
첫 번째 순서는 가브리엘이었다. 그는 일면식도 없는 블로그 이웃을 찾아 빠이로 떠난 나의 이야기에 몹시 흥미가 동하는 모양이다. 련보다는 현정과 만났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했고 자신도 블로그를 통해 만난 인연이 많다며 자랑했다. 처음에 봤던 밝은 인상이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연신 안테나가 찌릿찌릿한다며 당장이라도 떠날 듯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역시 역마가 있는 사람이다 싶다.
“가브리엘님은 제 얘기를 들으면서 오랜만에 여행 의지가 생기신 거 같아요. 모임 참석하시면서는 한동안 여행 생각을 하지 않고 지내셨었대요. 아무래도 주제가 그렇다 보니 그러셨나 봐요. 그래도 마침 비자 클리어가 얼마 남지 않아서 라오스 다녀오실 때가 되셨대요. 덜렁 출발하셨다가 기약 없이 눌러앉아서 모임에 결석하게 될까 봐 날짜를 못 잡고 계신다고 하네요. 저도 그렇고 가브리엘님도 그렇고 이 수다모임이 뭐길래 여행 일정 조정까지 해가며 참석하는지에 대해 얘기를 나눠봤습니다. 다녀온다고 마음 편해지는 모임도 아닌데 말이지요. 가브리엘님은 요즘 치앙마이 대학교 근처에서 지내신대요. 학교 안에서 책도 읽고 강의실도 들어가 보고 학생들하고 어울려서 같이 밥도 먹고 산책도 했대요. 태국어를 잘 하시나 봐요. 혹시 읽을 줄도 아시나요?”
가브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사람들이 와, 저마다의 감탄사를 뱉었다. 만나는 태국인들에게서 조금씩 배우다 보니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데 정말 대단하다. 똑똑해서 일 수도 있고 태국을 그 정도로 좋아해서 가능한 것일 수도 있는데 어느 쪽이건 떡 입이 벌어질 노릇이다. 태국을 좋아하는 사람도 보고 말을 곧잘 하는 사람도 봤지만 글씨를 읽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는데.
“엘리님은 다이어트 걱정을 했대요. 매일 야식을 먹으니까 체중이 느는 것 같아서요. 재보진 않았지만 옷이 작아진 것 같은 느낌이래요. 그래서 술을 좀 줄여보려고 했는데 잘 안됐다고 하네요. 저녁에 맥주 한 잔 마시면서 선데이 마켓에서 사 온 매니큐어 바르는 걸로 저녁 소일거리를 했다고 해요. 아니면 노래 틀어놓고 따라 부르기도 하고.”
“대박 사건! 은하님은 또 부부싸움 하셨대요. 어째 두 분이 사이 안 좋은 거 치고는 잘 안 싸운다 싶었거든요. 아, 은하님. 잘 싸웠다는 뜻으로 대박 사건 외친 거 아니에요. 오해하기 없기? 아까 얘기해주신 부부싸움 이야기가 또 너무 스펙타클해서 그런 거니까.”
“은하님의 부부싸움 이야기는 저희도 굉장히 궁금하지만 장 들어가서 은하님께 직접 듣는 게 더 좋을 것 같네요. 그렇죠?”
은하에 이어 엘리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연마담이 부드럽게 제지했다. 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돌아가며 새 짝과 이야기 나눈 소감을 이야기해보자고 한다.
“저는 내내 개똥이님과 가브리엘님이 신경 쓰였어요.”
은하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지난번에 그런 이야기를 들어선 지 엘리님도 저하고 이야기하기 재미없어하면 어쩌나 하고 신경도 쓰였고요. 생각해보니 제가 개똥이님 이야기 듣는데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제 상황도 그렇고 남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 처지가 아니니까요. 그래서 오늘은 엘리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신경 썼어요. 그런데 그 와중에도 개똥이님하고 가브리엘님이 신경 쓰이더라고요. 이상하게 개똥이님이 가브리엘님하고 이야기하는 게 마음에 안 들기도 하고요. 저하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어 보여서 언짢았어요. 저 아침에 늦었는데 반지 안 끼고 나온 거 알고 다시 가서 끼고 나오기도 했거든요.”
언짢았다까지가 끝인 줄 알았는데 잠시 망설이던 은하가 반지 얘기를 꺼낸다. 손을 들어 보인 은하의 손가락에는 오늘도 잘 어울리는 반지가 끼워져 있다.
“그 반지는 왜 끼고 나오신 거예요?”
연마담이 물어봤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다.
“모르겠어요. 방문을 나서는데 뭘 빠트린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예요. 뒤를 돌아보는데 화장대에 반지가 보이잖아요. 뛰다시피 가서 낚아채서 나왔어요.”
“늦어서 마음이 급했을 텐데 그 반지의 무엇이 은하님의 발걸음을 끌었을까요? 정말 궁금하네요.”
은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또 모른다는 말로 넘어가려나 싶었을 즈음에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낯부끄럽긴 한데 이거 개똥이님이 예쁘다고 해주신 반지거든요. 지난주에 저한테 피부 좋다고 얘기해주고 반지 잘 어울린다고도 해주셨잖아요. 그 말을 듣고 집에 와서 왔다 갔다 하면서 거울도 자주 보고 반지도 거의 내내 끼고 있었어요. 그냥 한 말일 수도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그런 칭찬을 대놓고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는 거 같아요. 야무지다, 부모 속 안 썩이는 애다 그런 거 말고요. 그래도 여잔데 예쁘다 잘 어울린다 그런말 들으면 기분 좋잖아요. 들어보니까 좋더라고요. 그 말을 해줬던 개똥이님이 가브리엘님과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역시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싶고 기분이 이상했어요. 그래서 옆에 엘리님에게 칠십 퍼센트밖에 집중하지 못했어요. 미안해요 엘리님.”
엘리가 후덕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다들 아시는지 모르지만 가브리엘님은 유명한 블로거세요.”
가브리엘이 휘휘 손사래를 쳤고 엘리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가브리엘에게 주소가 뭐냐고 물어봤다.
“제가 치앙마이 오기 전에 태국 어디로 갈지 정하면서 검색했던 블로그 중 하나가 가브리엘님 거였어요. 가브리엘님은 자기 사진을 공개해놓으셨거든요. 그래서 처음 뵀을 때부터 알아봤어요. 저에게 가브리엘님은 유명인 같은 느낌이 있었죠. 어쨌든 저를 치앙마이로 불러들이는데 일조한 분이니까요. 상담 끝나면 다들 정신적으로 좀 지치니까 곧장 헤어지기 일쑤라 말을 걸어볼 생각은 안 했는데 오늘 이렇게 일대일 대화를, 그것도 어제 저녁에 제가 바로 빠이에서 돌아온 상황에서 하게 되니까 이야기할 게 많았어요. 아, 이상하다. 저도 은하님께 변명하듯 설명을 하게 되네요.”
엘리가 두 사람 지금 썸이라도 타는 거냐며 가볍게 농을 던졌다.
“그러게요. 제가 지금 뭐 하는 거죠? 저도 사실은 가브리엘님과 얘기하면서 은하님과 엘리님 대화 나누는 거 신경 썼거든요. 저는 은하님이 철옹성을 쌓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엘리님은 그게 성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서슴없이 드나드시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며 제 마음속에 뭔가 걸리는 게 있었어요. 오늘도 엘리님은 은하님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시더라고요.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도 중요하겠지만 누구와 이야기 하는가도 중요한 문제구나, 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어요. 저는 은하님이 불편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얘기했었는데 그건 저한테만 그런 거였던 것 같아요.”
“두 분이 이렇게 절절하게 서로를 생각하는지 몰랐어요. 가브리엘님, 우리 버림받은 거 같지 않아요? 내 원년 짝꿍이 그리워지려고 해요.”
엘리가 웃는 낯으로 우는 소리를 했다.
“개똥이님은 몸도 약하다 하시고 남편한테도 이름만 부르라고 시킨다 하고 좀 까다로울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말투도 부드럽고 저하고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던데요? 태국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요. 좀 더 이야기해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짧아서 아쉬웠습니다.”
엘리의 말을 이어받아 가브리엘이 짧게 소감을 말했다.
“저는 개똥이님처럼 은하님이 불편하다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아예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했는데요? 지난주에 그런 말을 들어서 그런지 진짜 그렇게 말하는구나 하고는 생각했어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연마담의 말에 엘리가 즉각적으로 답을 내놓았다.
“별 뜻은 없어요. 어젯밤에는 까페 디짜이에 단체 스무 명이 들었습니다. 스무 명이 와서 각자 다른 스무 잔의 메뉴를 시켰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요. 뉴스나 신문에서 말하듯이 있는 사실만 말하는 거죠. 저라면 그 뒤에 모두 다른 메뉴라니 카페 주인 죽어 나겠네 혹은 인간적으로 다섯 잔씩이라도 통일하지 하고 덧붙일 거거든요. 있었던 사건보다는 그걸 보는 내 생각이나 느낌 같은 게 훨씬 길 거란 말이죠. 중요하기도 하고. 그런데 진짜 희한할 정도로 그런 거 없이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그 상태로 또 대화가 이어져요.”
“엘리님,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은하님과 대화하는 게 힘들거나 불편하지는 않으셨어요?”
내가 물어봤다.
“아니오? 안 불편했어요. 그게 아마 관심도 차이가 아닐까 싶어요. 개똥이님은 은하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으니까 답답하고 궁금하기도 하셨죠? 저는 안 그랬거든요. 진짜 이렇게 말하네, 신기하다. 그 정도지 그래서 이 사람이 뭐라 느꼈을까. 어떻게 생각할까 같은 건 별로 안 궁금하고 알고 싶다고도 안 생각했어요. 진짜 궁금했으면 물어봤겠죠, 뭐.”
명쾌한 태도로 엘리가 말을 마치자 은하가 이거야 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하고 중얼거렸다.
“그래서, 말해봐요 은하님. 우리 이제 들을 준비 됐어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