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페 디짜이(31-2) - 일곱 번째 수다모임

11월 5일 오전 열시 오십분 일곱 번째 수다모임(2)

by 서화림

오늘 연마담은 잘 어울리는 짙은 풀색 원피스를 입고 있다. 굴곡 없는 원피스가 몸을 다 가려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있어도 보기 흉하지 않다. 엉덩이를 의자 끄트머리에 걸치고 앉아 활개를 펴고 그녀는 은하를 쳐다보고 있었다. 곧 기지개라도 켜며 늘어지게 하품이라도 할 것 같은 자세. 하나 급할 게 없다는 태도다. 그러나 눈빛은 침착하다.


“남편이 요즘 늦게 들어와요.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내버려 뒀어요. 말하기 싫어서요. 어떤 날은 술을 마시고 들어오기도 하는데 또 어떤 날은 술 한 방울 안 마시고 멀쩡하게 들어오는 날도 있단 말이죠. 누구랑 먹는지는 모르지만 차라리 술이라도 먹고 들어오면 그러느라 늦는가보다 싶은데 멀쩡하게 들어오면 이 시간까지 뭐 하고 다닌 건가 싶어서 오히려 찜찜하단 말예요.”

하얀 블라우스 위로 은하의 가슴이 크게 두어 번 들썩거렸다. 한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잠깐 시간이 흘렀다. 앙다문 입술 사이로 나지막하게 아씨 짜증나, 마침내 말이 흘러나왔다.


“어제는 술을 안 마시고 들어왔더라고요. 한시가 다 됐는데 들어와선 밥을 찾아요. 줄 것도 없었지만 있다 해도 주기 싫었어요. 뭐하느라 이제 기어들어 와 가지고 그 시간에 밥을 찾아요, 그것도 당당하게? 일 할 때는 그럴 수도 있죠. 근데 지금은 놀잖아요. 같이 논다곤 하지만 나는 애 보느라 종일 붙들려 있는데 그런 나한테 와서 그 시간에 밥을 찾다니 말이야 똥이야? 그래서 햇반을 던져줬어요. 알아서 먹으라고요.”

“오, 태국도 햇반이 있어요?”

“엘리. 엘리. 그토록 순진한 표정으로 맥을 끊는 당신을 어떻게 미워할 수가 있겠어요.”

툭 던진 엘리의 말에 뮤지컬 배우가 노래하듯 답하는 연마담의 모습을 보며 긴장을 풀고 잠깐 웃는다. 남의 부부 일이긴 해도 역시 갈등을 듣는 건 마음에 부담을 주는가 보다.


“있어요 엘리님. 백화점 식품코너도 팔고 편의점에서도 팔아요. 쌀은 우리 거랑 다르지만 아무튼 먹는 방식은 똑같아요. 아무튼, 급할 때 쓸려고 사뒀었는데 밥 내놓으라니까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걸 던져주고는 저는 소파에 앉으러 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서 와장창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놀라서 돌아보니 햇반을 싱크대에 집어 던진 거예요. 황당해서 말도 얼른 안 나오더라고요. 지금 뭐 하는 거냐니까 너한테 집어던질 수는 없잖아. 이러는 거예요. 저도 그제야 소리를 질렀죠. 햇반에 뒤통수 깨질 뻔했는데 그릇이 구해줬다고, 그릇한테 대신 깨져줘서 고맙다고 해야겠다고. 그랬더니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오늘 일치겠다 싶더라고요. 근데 본척만척 저를 스쳐 지나가요. 뭐지 싶었는데 바닥에 떨어져 있던 인형을 치기 시작하는 거예요. 큰애가 낮잠 잘 때 안고 자는 자기 키만 한 인형이 있거든요. 온갖 욕을 하면서 그걸 사람 때리듯 패는 거예요. 처음에는 머리를 뻥 걷어차더니 깔고 앉아서 얼굴이랑 배를 막 때려요. 나중에는 지 분을 못 이겨서 벌떡 일어나서 차고 밟고 던지고 하여튼 난리가 났어요. 저 인간이 드디어 미쳤나보다 싶더라니까요. 그러더니 뭐해? 얘한테 고맙다 안 하고. 너 대신 맞아주는데. 글쎄 이러는 거예요.”


사랑 타령을 한다고 해서 나랑 비슷하다고 말하기는 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왜 내가 다 부끄러워지는지 모르겠다. 이제라도 비슷하다고 말했던 거 취소할까? 부인의 머리채로 목을 조르고 아이의 인형을 사람 때리듯 때리며 이게 너 대신이라고 말하는 마음에는 대체 뭐가 들었을까. 분명 폭력성은 있는데 묘하게 옆으로만 불똥이 비껴 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직접 손을 댈 용기는 없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건 비겁한 걸까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까.


“남편이 뭐래요?”

연마담이 물었다.

“이런 대접을 받고는 살 수가 없대요. 사사건건 자기를 무시한다는 거예요. 아니 자기가 지금 무시당하지 않게 생겼어요? 지금 우리가 치앙마이에 와 있기까지 이 모든 일이 다 자기 때문에 생겼는데 새벽 한 시에 기어들어 와선 밥을 달라고 나한테? 그 상황에서 누가 좋은 마음으로 옛다 먹어라 밥을 차려줄 수 있어요? 일 절만 하면 됐지 그러면서 꼭 다음 레파토리가 나와요. 기억도 안 나는 지긋지긋한 옛날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옛날이야기 뭐요?”

“예전에 자기가 아팠던 적이 있어요. 아프다 그러니 제가 병원 가라 그랬죠. 그랬더니 병원에 갔다가 출근하려면 차가 어쩌고저쩌고 그러는 거예요. 자기 아프니까 운전 못 한다 이거죠. 그래서 제가 콜택시 불러서 타고 가라고 그랬고 결국 그렇게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얼마 안 지나서 싸움을 걸더라고요. 그래서 싸우는데 그 소리를 하면서 제가 배려가 없다는 거예요. 자기를 무시한대요. 안 그럼 남편이 아픈데 병원도 안 태워 줄 수가 없다고. 매번 그런 식이에요. 나 원 어이가 없어서.”


“아픈데 안 챙겨주니까 그건 좀 서운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우리 엄마가 나 아플 때 그렇게 말했으면 난 서운하다고 울고불고했을 거 같은데.”

엘리가 얘기했다.

“자식이랑 남편이랑 같아요? 남편은 성인이잖아요. 남편 데려다주고 병원 진료 보고 회사까지 데려다주면 애들 하원 시간에 못 맞춰요. 가서 애들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오면 그 시간에는 아파트에 주차할 자리가 없단 말이에요. 그거 다 알면서 차를 어디다 대라고 날 더러 데려다 달래요? 배려가 없는 건 내가 아니라 자기죠. 자기 땜에 내가 곤란해질 걸 뻔히 알면서 자기를 위해 불편을 감수하라니 그런 이기주의가 어디 있어요?”


“난 다 컸어도 나 아픈데 엄마가 모른척하면 울고불고할건데요? 서운한 게 나이 따져가며 해도 되고 안되고 그런 건 아니잖아요? 맨날 태워다 달라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아픈 날 해달라는 건데 주차장 자리 없다고 차 대놔야 하니까 택시 타고 가라고 딱 자르면 난 진짜 서운할 거 같아요. 그리고 포인트는 주차가 아니잖아요? 아프다는 거지. 정 주차 때문에 힘들면 같이 택시 타고 병원 가면 됐을 거 아니에요. 남편 어디 아픈지 걱정도 안 됐어요? 만약 어디 많이 아픈 거면 어떡해요? 만약 병원에 같이 갔다면 회사까지는 혼자 가라 그랬어도 남편이 서운하다 안 했을 거 같아요. 나 아픈데 걱정 안 해준 게 마음 상한 부분이니까.”

가브리엘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동감하고 있었다. 아니, 그 당연한 사실을 지적해줘야 아는 은하가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이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표정 변화가 없다.


“은하님, 엘리님 말씀을 들으니 수긍이 가시나요? 여기 계신 다른 분들은 모두 이해하고 계시는데 은하님은 어떠세요.”

연마담이 은하에게 말을 걸었다.

“큰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기침 하고 열 좀 난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라면 남편에게 그런 부탁 하지도 않아요. 아프다고 걱정을 해달라고요? 저는 그런 생각 자체는 해보지도 못했는데 그 말을 들으니 더 어이가 없네요. 아무리 시간 여유가 더 있다 해도 직장 생활도 하면서 애 둘도 혼자 보다시피 하는 나한테 그런 소릴 해서 뭘 어쩌자는 거예요? 전 지난주에 개똥이님 남편이 햄버거 먹으러 가자면서 데리러 갔다는 이야기 들으면서 그 집 남편도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었어요. 차라리 개똥이님이 합리적이고 정상적이라고 생각했지. 만약 제 남편이라면 그 상황에서 데리러 간다 그러면 아주 입이 찢어져라 웃었겠지 하면서 비웃기도 했단 말이죠. 그러면 이 경우는 제가 햄버거를 먹으러 태우러 갔어야 한단 말씀이세요?”

은하가 말했다. 그녀는 억울해하는 것 같아 보였다.


“은하님, 개똥이님의 햄버거와 은하님 남편의 요구는 전혀 다른 사안이에요. 부인을 데리러 가면 좋은 남편이고 각자 가서 만나면 나쁜 남편인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아픈 건 다르죠. 사람이 아픈데, 크게 아파서 간호가 필요한 상황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아프면 마음도 약해지고 보살핌도 받고 싶잖아요. 어리광부리고 싶을 수도 있고요. 그 요구가 잘못된 게 아니란 말이죠. 그 필요가 충족되지 못하면 서운할 수 있단 말이죠. 은하님이 남편의 그 보편타당한 마음을 이해를 못 하고 계세요.”

차분한 어조로 연마담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은하는 아랫입술을 잘근대며 씹고 있었다. 그녀의 윗니에 분홍색 립스틱이 묻어나고 있었다.


“저희 엄마는 얼핏 봐선 엄했지만 사실은 엄하다기보다는 예민한 엄마였어요. 제 별명 개똥이를 봐서 아시듯 저는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고 예민한 아이였어요. 그런데 제가 어디 가서 좀체 몸이 약하다거나 몸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단 말이죠. 병치레가 잦은 사람들은 병원에 자주 가니까 크게 아플 일도 없다고 하지만 저는 좀 아파서 병원에 가면 의사들이 그렇게 말해요. 아파서 어떻게 참았어요? 안 아파요? 하고요. 하도 그런 말을 들으니까 나중에는 그런 말을 안 들으면 내가 덜 아픈데 병원에 왔나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게 왜 그렇게 된 거냐면요, 어린 시절이잖아요. 몸이 아프면 기댈 데가 부모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저희 엄마는 저 아프다는 소릴 정말 싫어하셨거든요. 걱정했다기보다 굉장히 스트레스받아 하셨어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느꼈어요. 좀 더 크고 나선 어디 가서 아프다는 소리 하지 마라. 꽃놀이도 세 번이면 질린다. 남 아프다는 얘기 좋아하는 사람 하나 없다.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저는 엄마의 가르침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어요. 어느 순간부터는 저 아픈 걸 싫어하는 엄마에게도 하지 않게 됐죠. 꽃놀이도 세 번이면 질린다니까요. 그래서 저희 엄마는 제 건강 상태를 몰라요. 이제 와서는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지도 않고요. 은하님 남편 이야기를 들으며 저희 엄마 생각이 났어요. 몸은 아픈데 알아주지 않으니까, 싫어하니까 혼자서 앓던 제 생각이 났어요.”

서러웠어요, 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을 맺으면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은하는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답답해 온다. 나를 좌절하게 만드는 저 철벽은 은하의 것인지 내 남편의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얻어맞고 나면 온몸에 멍이 든단 말이죠. 겉으로는 멍이 안 들어도 속으로 곯기도 하나 봐요. 진짜 안 아픈 데가 없어요. 좀 덜 얻어맞았으면 지금보다 5cm는 더 컸을 텐데 저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때리는 아버지는 맨날 그러니까 밉다거나 싫다거나 그런 것도 없어요. 그런데 엄마는요, 괜찮냐고 묻지를 않았어요. 아프지 하면서 한 번만 쓸어줘도 괜찮았을 거 같은데 한 번을 아는 척을 안 했어요. 저희 형제 동네 나가면 사람들이 다 아버지 욕했거든요. 손댔다 하면 얼굴이고 팔이고 보이는 데고 안 보이는 데고 온통 멍이라 모른 척도 할 수 없을 지경이라서요. 대놓고 아버지 욕하는 사람도 있고 가끔 너무 심하면 말리러 오는 사람도 있고 그랬어요. 가정폭력이라는 단어도 없던 30년 전이고 그게 범죄도 아니었던 땐데도요. 그런데 엄마만 그랬어요. 저는 그게 아는 척하기에 엄마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왔었거든요. 그런데 오늘 은하님 말씀하시는 거 들어보니까 우리 엄마도 진짜 못 느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은하님처럼 개똥이님 엄마처럼 아픈 남편이, 아픈 자식이 마냥 귀찮고 짐 같을 수도 있는 거였어요. 하!”

가브리엘은 몹시 동요한 눈치였다. 아랫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며 입가에 침이 묻어났다. 손으로 무릎을 있는 힘껏 누르는 듯 보였지만 좀체 다리 떠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여태 많은 이야기를 해왔지만 지금 같은 반응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 격렬한 반응을 보는 게 무서웠다.


“암 걸렸었다고 말했잖아요. 저 완전 초기에 알게 됐거든요. 정밀검사 안 했으면 절대로 모르고 지나갔을 정도인데 느낌이 쌔 한 거예요. 우겨서 검사받았어요. 결국 암인 거 확정되었죠. 난 좀 어리벙벙한데 아빠가 위로를 해주는 거예요. 그나마 빨리 알아서 다행이라면서. 그땐 나도 그렇게 생각했죠. 근데 사람 마음이 웃긴 게 수술 날짜가 다가오니까 그 말이 서운하기 시작하더라고요. 내가 암이라는데 부모면 더 걱정하고 더 울어야 하는 거 아닌가 못마땅해졌어요. 그래서 서운하다고 대놓고 모진 소리도 하고 그랬거든요. 수술 잘못되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나한테 잘하라는 소리도 하고 그랬는데 오늘은 후회돼요. 전 여태 그게 제 당연한 권리인 줄 알았거든요. 온 가족의 걱정 속에서 수술하고 간호도 받고 회복하고 하는 거요. 그런데 아닐 수도 있었던 거였네요. 개똥이님처럼 우리 엄마가 나 아픈 걸 싫어할 수도 있다는 생각 같은 건 해보지도 않았어요. 가브리엘님처럼 우리 아빠가 나를 아프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더더군다나 해본 적도 없어요. 만약 우리 가족이 그랬으면 진짜 인연 끊거나 내가 나가 죽거나 했을 거예요.”

엘리는 말하는 내내 나와 가브리엘의 눈치를 살폈다. 마치 나와 가브리엘이 자신을 비난하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나 나는 내 안에서 만난 남편과 바깥에서 만난 가브리엘의 불안에 잠식당한 상태였다. 옆자리 가브리엘의 산만한 몸짓을 보면 그도 나와 같은 상태인 확률이 높다. 연마담과 은하만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은하님,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들은 느낌이 어떠세요?”

연마담이 은하에게 물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은하가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잘 모르겠는 것이라도 입으로 내어 말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생각나는 게 없어요.”

“시간을 들여도 괜찮아요. 충분히 생각해보신 후에 말씀해보세요.”

“솔직히, 다른 분들 얘기를 제대로 듣지도 않았는데 생각날 게 뭐가 있겠어요?”

“각자 자기 얘기를 하기는 했지만 그 시작과 내용은 은하님을 이해시키기 위한, 은하님에게 도움을 주려는 이야기였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며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고요? 심지어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도 않았다고요? 어째서요?”

여태까지 연마담은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현을 존중해주는 사회자였다. 그래서 엘리는 시시때때로 그 의사를 피력해 자기 차례를 피해가곤 했다. 오늘의 연마담은 그때와는 다르다.


“선생님, 살아온 환경이 다 다르고 그렇다 보니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저분들 자신도 아닌데 어떻게 그 마음을 다 이해할 수가 있겠어요? 제 일도 아닌데. 저는 잘 모르겠다고요. 아니, 제가 뭘 꼭 알아야 해요?”

“모르고 싶은 건 아니고요?”

은하와 연마담의 날 선 공방이 계속된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로 보며 숨을 골랐다.


“은하님, 미개척지를 불모지로 버려두지 마세요.”

“무슨 말씀이세요?”

“모르는 건 없어요. 모르고 싶거나 피하고 싶은 거면 몰라도.”

따질 듯 입을 열었던 은하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세상 전부를 다 알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꼭 알아야 할 것도 있어요. 그리고 그 순간이 왔을 때 고개 돌리지 않는 용기도 필요하죠. 바로 그때가 왔어요, 은하님.”

연마담이 타이르듯 말을 시작했다. 은하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연마담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 나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서글퍼 보이기도 했다.


”은하님은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분은 아니에요. 감성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묘하게 남편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공감 능력을 떨어뜨리려는 것 같아요. 길 가다 몸 아픈 사람을 발견하면 은하님은 어떻게 행동하실까요? 상태에 따라 다르겠지만 119에 신고를 해줄 수도 있겠고 급하다 싶으면 차에 태우고 데려다줄 수도 있겠지요. 그 정도 양심은 있는 분으로 보여요. 그런데 그 일을 남편에 대입시킨 순간, 자기 일은 자기가 해야지, 이 민폐 덩어리! 하고 몰아세워요. 남편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면서. 남편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을 돕기 위해 개똥이님과 가브리엘님이 어려운 이야기를 해주셨는데도 남편을 이해하지 않기 위해 혹은 남편을 이해하게 될까 봐 애써 귀를 막고 듣는 느낌이었어요. 제 얘기가 이해가 가시나요? 제 얘기를 들으며 은하님은 어떤 느낌이 들었나요?”

“제가 남편을 이해하게 될까 봐 다른 분들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했다는 말이 마음에 남네요.”

“좋아요. 그 실마리를 놓지 마세요. 끝까지 꽉 쥐고 그 끝에 뭐가 있는지 꼭 확인하길 바랄게요.”

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에서 장을 마무리해야겠지만 오늘은 하나 더 해보죠. 다들 시간 괜찮죠? 한 30분쯤? 좀 늦어져도 괜찮겠어요? 잠시 기다려주세요.”

갑자기 윤마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그녀는 카페 구석에 밀어둔 테이블로 가서 의자 하나를 집어 들어 끌고 와 자기 자리 옆에 놓았다. 그러고는 상담실에서 귀가 짧은 토끼 인형 하나를 가져와 빈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윤마담, 토끼 인형, 가브리엘, 나, 엘리, 은하 순으로 자리가 재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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