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5일 오전 열시 오십분 일곱 번째 수다모임(3)
“가브리엘님의 엄마예요.”
몹시 당황한 표정의 가브리엘이 인형을 힐끔 쳐다보곤 윤마담을 쳐다봤다. 그의 둥근 눈이 토끼보다 더 동그래졌다.
“아무래도 가브리엘님이 지금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아 제가 엄마를 모셔 왔어요. 이 인형을 엄마라고 생각해보세요. 감정 이입이 어렵다면 저를 엄마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윤마담이 설명했다. 아아, 비로소 이해가 된 듯 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당사자인 가브리엘은 얼은 듯한 모습으로 인형과 윤마담을 번갈아 가며 보고 있었다. 윤마담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엄마.”
마치 허락이라도 구하듯 그가 인형을 보고 어렵사리 엄마, 라고 부른 후 윤마담을 쳐다봤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불렀을 뿐인데 그의 코가 새빨개지고 있었다. 엘리의 울음이 터졌다.
“엄마 있잖아, 나 엄마가 그리 싫어하는 태국에 또 왔어. 요즘 여기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서 집단 상담이라는 걸 받는단 말이야, 그래서 나 요즘 술 먹어. 절대 안 먹으려고 했는데. 아부지처럼 될까 봐. 그래도 뭐 집어 던지고 하지는 않아. 내가 그렇게는 안 하지.”
미리 써 놓은 편지라도 읽는 듯한 말투로 가브리엘이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엄마. 나 요즘 여기서 옛날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는데...... 궁금한 게 많아졌어. 엄마에 대해서. 뭐냐면 엄마, 왜 한 번을 아프냐고 안 물어봤어? 나한테만 안 한 거야, 정국이한테도 안 했어? 난 엄마 멍든 얼굴 쓰다듬으면서 아프겠다고도 하고 괜찮냐고 물어도 봤는데. 아빠 욕도 했잖아. 엄마는 왜 나한테 한 번도 안 물어봤을까, 왜? 진짜 개똥이님 엄마처럼 내가 마냥 귀찮기만 했어? 은하님처럼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엄마 인생도 힘들어 죽겠는데 자식 셋 딸린 게 혹 같았어? 그렇게 무거웠어? 진짜 나 아버지한테 맞는 거 아무렇지도 않았어?”
말끝에서 눈물이 비져나오기 시작했다. 주먹으로 눈가를 훑은 그가 다리를 떨며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누나 도망올 때마다 그러고 돌려보내면서 매형한테 한마디 싫은 소릴 안 했던 것도 매형이 앙심 품고 누나한테 더 나쁘게 대할까 봐 그랬던 게 아니라 사실은 매형이 이혼이라도 할까 봐, 그래서 겨우 던 짐 다시 짊어지게 될까 봐 그랬던 거 아니야? 왜 그렇게 매번 단호하게 못 하게 했어? 나는 왜 병신처럼 번번이 엄마한테 졌을까? 내가 그때 매형 멱살이라도 붙잡았으면 뭐라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누나가 부모랑 남편한테는 사랑 못 받는다는 걸 알아도 형제라도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엄마. 우리 형제는 왜 그렇게 뭔 일만 있으면 도망을 치는지 엄마는 알아? 매형한테 당하고 엄마한테 도망오던 누나나 그 여자한테 당하면 엄마 찾아오던 나나. 한 번을 막아주지 않는데 왜, 왜 그렇게 못 미더운 엄마만 찾는지 엄마는 알아? 근데 엄마는 그것도 싫었어?”
대답하는 이 없는 질문이 허공에 뿌려졌다. 누구도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토끼 인형이 누군가의 매정한 뒷모습처럼 보였다.
“그리고 엄마 있잖아, 아부지 말야 옛날에. 그냥 죽으라고 내버려 뒀던 거 아냐? 생각 안 하려고 해도 자꾸 마음속에 그런 의심이 생겨나. 난 그때 내 자식은 안 된다고 막아서던 엄마가 되게 든든했거든. 생각해보면 엄마가 우리를 위해 나설 사람이 아닌데. 그 순간에는 엄만 평생 우릴 위해 그래왔던 사람 같았어. 자식을 보호하고 아끼는. 그래서 나는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남편을 내버려 둔다는 엄마를 믿고 싶었어. 그런데 엄마. 요즘 난 불안해. 그냥 엄마는 자식이고 뭐고 간에 자기를 괴롭히던 남편을 합법적으로 죽이고 싶었던 거 아니었을까? 그리고 나도 사실은 엄마의 그 마음을 알고 있었던 거 아닐까? 아니면 나도 엄마처럼 아부지가 죽기를 바란 건 아닐까? 그래서 검사라도 받아보자고 나서지도 않고 엄마 말 그렇게 곱게 들은 거 아냐? 엄마...... 만약 진짜면......!”
그 후부터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작은 목소리로 워낙 빠르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좀 더 크게 말해달라 요청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우리를 향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어느 순간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하늘을 보며 입을 크게 벌리고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뭐라 말할 듯 웅얼거리기도 하더니 곧 우는 것에만 집중했다. 사지를 형편없이 팽개친 모습으로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꼭 감은 채 그는 목을 놓아 울었다. 행인이 적은 골목길이지만 울음소리 때문인지 까페 밖으로 사람들이 서성이다 사라지곤 했다. 연마담이 토끼 인형을 치우고 그 자리에 앉아 가브리엘의 등을, 가슴을 쓸어주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굵은 눈물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졌다. 왼쪽에서는 가브리엘이, 오른쪽에서는 엘리가 경쟁하듯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나도 따라 울거나 엘리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마음만이 몹시 서글플 뿐이었다. 울음만이 가득한 고요한 공간에서 나와 은하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물기 없는 눈빛이 위안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