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9일 오전 열한시 십분 여덟 번째 수다 모임(1)
“자, 지금부터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해봅니다. 어깨에 힘을 툭 풀어보세요. 몸에 힘을 쭉 빼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우리 몸 구석구석을 느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우리 머리를, 그중에서도 얼굴을 느껴봅니다. 먼저 두 눈을 가만히 느껴보세요. 눈두덩이가 피로로 뜨끈하게 느껴지지는 않나요? 감은 눈을 한번 굴려봅니다. 피곤한 눈을 풀어주세요. 코는 어때요, 막힌 쪽 없이 제 기능을 다 하고 있나요? 곧 따뜻한 커피가 들어올 입술은 어떤가요? 두 귀를 통해 제 목소리가 잘 전달되고 있나요? 머리 구석구석에 신선한 혈류를 보내서 의식의 깨어있음을 느껴보세요.”
오랜만의 명상이다. 다를 것 없는 시간 다를 것 없는 장소, 다를 것 없는 연 마담의 목소리가 오늘은 어쩐지 특별하게 느껴진다. 이 수다 모임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이 자리가 편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 느낌을 좀 더 가져가고 싶다.
“이제 양쪽 어깨입니다. 왼쪽 어깨와 오른쪽 어깨를 가만히 느껴보세요. 어느 부위가 긴장되어 있는지 편한지, 어깨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지켜보겠습니다. 어깨를 타고 팔뚝, 팔꿈치, 손가락에서 손끝까지 느낌을 이어나가 보세요. 자, 이번에는 가슴과 등을 동시에 느껴보겠습니다. 소중한 숨을 쉬게 하는 가슴의 움직임, 등의 움직임을 입체적으로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집중하고 있는 신체 부위가 나에게 뭐라고 얘기하고 있는지를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짧은 명상이 끝났다. 다른 때와 달리 함께 명상에 참여했던 연 마담이 가장 늦게 눈을 떴다. 여기서 했던 모든 명상이 진작 이렇게 고요하고 평안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불현듯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인사하듯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던 연 마담이 소리 없이 빙긋 웃는다.
“고작 한주 더 쉬고 만날 뿐인데도 연 마담입니다 하고 처음 만나던 날로 돌아가 자기소개를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모두 잘 지내셨죠?”
이제는 알 것 같다. 모두 잘 지내셨죠, 하는 저 인사가 서로의 근황을 물어보라는 신호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그런가 보다. 엘리가 넙죽 말을 받는다.
“전 잘 지냈는데 일주일에 한 번 있던 모임이 없어지니까 너무 섭섭하더라고요. 그래도 방콕에서 친구들이 놀러 와서 오랜만에 심심하지 않게 보냈어요.”
“저도 정기적으로 나오던 모임을 쉬니까 서운했어요. 그새 습관이 됐나 봐요. 그러고 보니 우리 모임, 이제 끝날 때 되어가지 않아요?”
은하가 엘리의 뒤를 이었다.
“오늘이 벌써 여덟 번째 모임이에요. 여덟 번이면 두 달이나 되는데 긴 시간 결석 없이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칭찬해요.”
연 마담이 기분 좋게 말했다.
“지난주도 빠지지 않고 모였으면 좋았을 텐데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가브리엘이 꾸벅 인사를 했다. 각자 괜찮다며 한마디씩 했다.
빠이에 다시 간지 일주일째 되던 밤 모임을 앞두고 돌아갈 말까를 고민하던 때였다. 연 마담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가브리엘의 부탁이라며 모임을 한주만 미룰 수 없겠냐는 것이었다. 빠이에 계속 머문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중이었기 때문에 가브리엘의 제안이 나는 고마웠다. 다른 사람들도 동의했다고 해서 상담이 한주 미뤄졌고 나는 덕분에 일주일을 더 빠이에서 보내고 어제서야 치앙마이로 돌아왔다. 새삼 까맣게 탄 가브리엘을 보니 그도 어딘가 다녀왔나 보다.
“지지난 주 상담 마치고 바로 라오스 갔었습니다. 방비엥에 앉아서 비엔티안을 갈까 말까 하는데 상담 날이 다 되어 가더라고요. 게스트하우스에서 전화 빌려서 선생님께 전화 드렸습니다. 처음에는 결석한다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막상 선생님 목소리를 들으니 한주만 쉬어가자고 떼를 쓰게 되더라고요. 갑작스런 전화에 당황하셨을 텐데 다른 분들이 동의해주시면 그러자면서 저 대신 전화도 돌려주시고 그 덕분에 제가 시간을 벌었습니다. 다들 무슨 일인지 영문도 모르셨을 텐데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브리엘이 또다시 꾸벅 인사를 했다.
“와, 가브리엘 님 멋있어요. 어쩜 그렇게 쉽게 떠나요?”
엘리가 감탄했다. 옆에서 은하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있는 것보다 가는 게 더 쉬웠으니까요.”
가브리엘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이번에는 내가 가브리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자세하게 얘기해줘 봐요. 우리는 여행 초심자들이잖아요.”
연 마담이 채근했다. 저럴 때 그녀는 영락없는 호기심 가득한 소녀 같다.
“선생님, 여태껏 저는 제가 역마살이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좀 쑥스럽긴 해도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머물러 있는 것보다 떠나는 게 더 쉽다고 대답해왔거든요. 그런 말 하면서 제가 무슨 대단한 여행자라도 되는 양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제 모습을 보면서 이건 떠나는 게 아니라 도망치고 있는 거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지난 주 상담에서 인형한테 엄마라 부르고 집에 돌아가서는 잡히는 대로 짐을 꾸려서 바로 치앙콩으로 출발했습니다. 얼마나 서둘렀으면 치앙마이에서 두 시 다 되어 출발했는데 하루 만에 국경을 넘었을까요. 다음날 훼이싸이에서 슬로우 보트를 타고 1박 2일을 내려가는데 마음은 스피드 보트가 있으면 그거라도 잡아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치앙마이에서 루앙프라방까지 이동만 3일인데 제가 6일째에 벌써 방비엥에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이동만 한 거예요. 비엔티안으로 가려고 하는데 상담 날이 다가왔더라고요. 그때 알았습니다. 제가 지금 치앙마이에서, 아니 여기 디짜이 까페에서 최대한 멀어지려고 발악하는 중이라는 것을요. 희한하게도 그걸 깨닫고 나니까 멈춰지더라고요. 선생님께 전화하고는 방비엥에서만 머물다 왔습니다. 더 내려가고 싶은 생각이 안 들더라고요.”
“왜 그렇게 우리에게서 도망이 가고 싶었을까요?”
또다시 연마담이 질문을 던졌다.
“지난주 상담에서 너무 말을 많이 했어요. 하지 않아야 할 말까지도요. 그게 부끄럽기도 했고요.”
말이 끝났을 것 같지 않은데 가브리엘이 뜸을 들인다. 큼, 헛기침으로 목을 한번 다듬더니 어렵게 말을 이어갔다.
“저는 어떤 식으로 생각을 정해뒀던 게 아니었어요, 선생님. 그냥 나오는 대로 말했는데 말하고 나니 이게 내가 이미 생각하고 있던 거라는 걸 깨달은 거였어요. 제가 말한 내용에 제 스스로 깜짝 놀란 거예요. 너무 놀라니까 도망이 가고 싶더라고요. 다른 생각은 없었어요. 도망쳐야겠다 그 생각밖에는요.”
말 속에 힘이 없다. 그래도 가브리엘은 자기 생각을 말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감 없는 태도와는 달리 자신을 상당히 정확하게 보고 있는 것 같다.
“가브리엘 님,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하곤 놀랐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놀랐다고 다 도망을 가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가브리엘 님은 그 먼 데까지 한달음에 도망을 갔단 말이죠. 저는 그 전화를 받고 어쩌면 가브리엘 님이 다시는 수다 모임에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을 했었어요. 가브리엘 님이 돌아와서 대단히 기쁘고 또 그 돌아온 것 자체가 용기 있는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가브리엘 님이 왜 도망을 갔는지, 도망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었는지에 대해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잘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가브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내내 개똥이 님에게 궁금한 게 있었어요. 이번에 와서 만나면 꼭 물어봐야지 하고 생각했어요.”
은하의 말에 자연스럽게 주제가 나로 옮겨왔다. 연 마담이 나를 쳐다보자 은하가 말을 이어갔다. 생각지도 않은 은하의 말에 나도 집중하게 된다. 뭘까. 이 사람은 내게 뭐가 궁금한 걸까.
“개똥이 님 말씀을 통해 두 분 부부 문제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데요, 그게 결정적인 별거의 이유는 아니라고 말씀하셨잖아요. 두 분의 그 결정적인 이유가 뭔가요?”
이번에는 내 쪽에서 생각에 잠길 차례다. 짧은 결혼생활 동안 겪었던 많은 일이, 이 자리에서 내놓을 수 있을법한 여러 사건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