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페 디짜이(35-3) - 여덟 번째 수다모임

11월 19일 오전 열한시 십분 여덟 번째 수다 모임(3)

by 서화림

“은하 님, 가브리엘 님께서 어렵사리 가브리엘 님의 가정사와 누나 이야기까지 해주셨는데 그 앞에서 회까닥 돌아버린다는 표현을 쓰시는 건 가브리엘 님에게 배려 없는 말이지 않을까요.”

담담한 어조로 연 마담이 지적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저희 집 개념 없는 남자 이야기였는데. 오해하지 마세요.”

일이 일단락되는 듯했다.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가브리엘이었지만 사과를 하는데 어쩌겠는가. 그런데 연 마담이 불쑥 가브리엘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가 움찔했다.


“가브리엘 님, 진짜 괜찮아요?”

“예에?”

“진짜 괜찮냐고요. 지금 기분이 어떤지 말 해보세요.”

“아니, 안 괜찮으면 어쩝니까. 이미 말은 튀어나왔고 또 은하 님이 사과도 했는데.”

“그러니까 가브리엘 님은 괜찮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괜찮은 척을 하고 계시다는 거지요?”

벌떡 일어난 연 마담이 상담실로 들어가더니 트럼프 카드를 한 벌 쥐고 나왔다. 뭔가 싶어 고개를 빼고 들여다보는 엘리를 뒤로하고 그녀가 가브리엘에게 카드 케이스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가브리엘이 그것을 받아쥐었다.

“가브리엘 님, 그건 감정 카드예요. 그 카드를 보면서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전부 다 골라보세요.”

가브리엘이 한 장 한 장을 신중히 넘기기 시작했다. 더러는 옆으로 빼놓기도 했고 더러는 한 장을 들고 한참 고민하기도 했다. 우리는 입을 다물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카드가 모두 넘어갔다. 그가 분류한 카드를 연 마담에게 주었다. 이윽고 연 마담이 큰 소리로 또박또박 카드를 읽기 시작했다.


“분하다, 얄밉다, 황당하다, 화나다, 짜증 나다, 당황스럽다, 실망하다, 원망스럽다, 우울하다, 억울하다, 어색하다, 긴장되다, 마음 아프다, 속상하다, 서럽다. 우와, 이렇게나 많네요. 가브리엘 님이 이렇게 많은 감정을 느끼고 계신답니다, 은하 님.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나는 놀랐다. 은하의 얼굴이 붉어진 걸 보았기 때문이다. 빚어 놓은 인형처럼 좀체 표정이 바뀌지 않던 그녀가 얼굴이 붉힌 채 목덜미를 긁적이고 있다. 처음으로 그녀의 인간미를 확인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 말에 이렇게 가브리엘 님이 마음의 상처를 입으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도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은하 님이 감정 카드를 골라보도록 할까요. 다 고르면 읽어주세요.”

“황당하다, 곤란하다, 미안하다, 안타깝다, 불편하다, 후회스럽다입니다.”

“가브리엘 님, 은하 님의 감정 카드를 읽고 나니 어떠신가요?”

“신기하게도 말로 사과받은 것보다 기분이 낫네요. 신기합니다.”

“좋습니다. 감정은 별 것 아닌 것으로도 좋아질 수 있지만 반대로 별 것 아닌 것으로도 상할 수 있습니다. 충분히 설명해서 풀어낼 수 있으면 좋지만 때로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상대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확인하면 진심을 더 잘 느낄 수 있겠지요. 아픈 가족이 달린 문제니만큼 잘 풀지 않으면 후에도 앙금이 남을 것이 걱정돼서 감정 카드로 서로의 마음을 알아보고 또 풀어보는 시간을 만들어 봤습니다.”

다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은하와 어딘지 머쓱한 표정의 가브리엘을 엘리가 방글방글 웃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온 얼굴로 잘 풀어서 다행이야, 라는 말을 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타인의 일에 저렇게 열심인 그녀지만 정작 자기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상담 8회차나 된 오늘도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심산인가. 저리도 열심히 반응을 해주니 뭐라 할 도리도 없다.


“자, 은하 님의 질문으로 돌아가 볼까요? 은하 님, 감정 카드를 한 번 더 꺼내 보죠. 남편을 생각하며 느끼는 감정을 찾아보세요.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에 대해 생각하며 카드를 뽑아 보세요.”

입술을 뾰족하게 오므린 채 은하가 카드를 뽑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좀체 카드가 나오지 않아 열 장이 넘는 카드를 그냥 흘려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첫 번째 카드가 나왔다. 걱정되다. 뒤를 이어 답답하다, 혼란스럽다, 화나다, 실망하다, 곤란하다, 미안하다, 안타깝다, 서럽다, 억울하다의 순으로 아홉 장의 카드가 더 나왔다. 카드 중 절반은 의외의 감정이었다. 좀 더 공격적인 카드가 나올 줄 알았는데.


“카드를 먼저 뽑아 보라고 한 이유는 자기감정을 먼저 구체화해보라는 의미에서였어요. 은하 님은 그런 질문을 왜 하신 거죠? 곧 이혼할 것처럼, 돌아서면 그만인 것처럼 비난하고 이해하지 않으려고 귀를 막는 노력까지 하게 하는 남편이잖아요. 그런 남편이 망가질까 봐 두려워요? 왜요?”

“걱정되죠, 선생님. 우리 애들 아빤데 어디서든 번듯하게 잘 살면 좋잖아요.”

“단지 그것뿐?”

“그것뿐이라기보다는 가브리엘 님 누나 얘기를 들으면서 남편 생각도 났고요, 만약 남편도 자포자기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도 됐어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말을 막 하게 되어서 가브리엘 님에게 상처를 주게도 되었네요.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가브리엘 님.”

은하가 깍듯이 사과했다. 말끔히 개인 얼굴로 가브리엘이 이제 정말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며 사과를 받았다.

“그런데요 은하 님, 어차피 돌아서면 남 아니에요? 돌아설 남자가 나 놔두고 잘살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에요? 어쩌면 나 버리고 가서 잘산다 하면 저는 그게 더 약오르고 화날 거 같은데.”

“의외네요 개똥이 님. 저는 개똥이 님이라면 이혼한 전남편도 잘 살기를 바랄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요? 여태 겪었던 일이 있잖아요. 나 버리고 가는 나쁜 놈 잘 살아서 뭐해요? 돌아선 마당에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내 전남편이 형편없이 산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잘 사는 게 낫지 않아요? 게다가 애들 아빠기도 하고.”

“전남편 잘 산다는 얘기를 누구한테 할 건데요? 애들 입장에서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어차피 같이 살지도 않을 아빠가 잘 되든 못 되든 무슨 상관이에요. 엄마 있으니까 됐죠. 주 양육자인 엄마가 잘 사는 게 중요하죠. 그래야 애들도 양질의 양육 환경이 보장될 테니까요.”

은하는 나의 말에 동의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연 마담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의사라면 지금 이 시각에도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나는 노화 현상이라거나 신비한 세포 분열에 대해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심리 상담사인 저 연 마담은 우리 안에서 생겨났다 사라지는 감정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인지하고 있건 그렇지 않건 우리 안에는 지금도 수없이 많은 마음이 생겼다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 마음들은 노력 없이는 붙들어둘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짧게 머물고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때로 길게 머무른다 해도 우리가 그 마음이 거기에 있는지 몰라주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감정 카드를 들고 나왔습니다. 우리를 스쳐 가는 마음을 붙들어 이름을 붙여주기 위해서. 그것들을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것부터 시작해보자고 권해 봅니다. 그렇게 한 발짝 내딛는 거예요. 은하 님은 오늘 그 감정 카드를 집에 가져가세요. 가서 시시때때로 카드를 보며 지금 내 감정이 어떤지를 스스로에게 알려주세요. 그리고 남편을 생각하는 내 마음도 찾아보도록 하세요. 지금 은하 님에게 필요한 것은 남편이 어떻게 될 것인가가 아닌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입니다. 오늘 다른 분들도 생각할거리들을 많이 얻어가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음 주는 휴식 없이 수다 모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벌써부터 폭죽 소리에 밤잠 설치는 러이 끄라통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걷다가 발밑에 터지는 폭죽에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시고 즐거운 러이 끄라통 보내고 오시길 까페 디짜이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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