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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카이-나이 80에 물놀이가 체질인 줄 처음 알았다

부모님의 물놀이 체질을 이제야 알게 된 여자

보라카이로 가는 여정은 복잡하므로, 원정이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보라카이는 워낙에 작은 섬이라, 비행장이 없다.  보라카이로 가려면 인천공항에서 4시간 비행을 하고 보라카이 근처섬 칼리보 공항에 내려야 한다. 다시 VAN(승합차량)을 타고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를 차로 이동해 보라카이로 들어가는 선착장에 내린다. 그리고, 10분 이상 배를 타고 본섬에 도착해서 선착장 게이트를 통과하고, 숙소까지 트라이시클( 지프니와 함께 필리핀의 대표 이동수단- 오토바이에 좌석을 달아 4-5인이 탈 수 있는 교통수단) 타고 가야 한다. 한두 번 다니다 보면 금방 익숙해지지만 처음 가보면 산 넘고 물 건너 이동하는 시간이 10시간이 넘기 때문에 지칠 대로 지친다.( 다행히 우리가 묶는 리조트에서는 전용보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서, 몇 가지 과정을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단언컨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해질 무렵의 보라카이 바닷가를 처음 보게 된다면, 그간의 고생을 완전히 잊게 된다. 세상 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은,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너머 바다가 나를 부르기 때문이다.


원정길에 오르면서, 틈틈이 정여사(친정엄마의 애칭)의 컨디션을 챙겼다. 정여사는 4번의 암 수술을 이겨냈다. 연이은 수술의 후유증으로 골다공증과 부정맥이 생기고, 체력이 급격히 약해졌다. 여행 전에 체력 안배를 위해  내과에 들려 영양주사도 맞았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많이 신경 쓴 것은 정여사의 컨디션이었을 것이다.


10시간의 긴 여정 끝에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에 도착한 나는 정여사에게 괜찮은지를 물었는데, 뜻박의 대답이 돌아왔다.


"차 타는데 이런데 여행지가 있나 싶은 거야. 가도 가도 나무하고 들판만 나오고 여기서 뭘 하자는 건가 싶었다니까! 그런데, 이런 바다가 어떻게 나오는 거냐? 이런 바다가 어떻게 있는 거냐?"

빨갛게 상기된 정여사의 표정에서 설렘이 느껴졌다. 

긴 여행으로 지친 정여사의 피로를 보라카이 바다 석양이 풀어주었던 것 같았다. 우리는 서둘러 리조트에 체크인을 했다. 우리 인원이 12명인데, 남자 6명- 여자 6명이었다. 방은 남자방 여자방으로 나누어서 배정하고, 정여사의 체력을 위해 1층은 여자방 2층은 남자방으로 했다. 정여사 님께  한국에서 가져온 누룽지를 끓여드렸다. 정여사는 끼니를 놓치면, 당이 떨어지는 사람처럼 온몸에 기운이 없어진다. 정여사는 잠시 쉬어야겠다며, 침대에 누웠다. 아이들은 다른 방 침대 올라가서 소리치며 뛰어들었다. 이제야 창문 밖 멀리 바다와 파아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둘러 바닷가로 나왔다. 빨리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싶었고, 너무너무 먹고 싶었던 산미구엘을 시원하게  들이켜고 싶었다.  산미구엘은 필리핀 대표 맥주이다. 우리나라로 하면 Cass 같은 맥주이다. 한국에도 산미구엘이 수입되어 오지만, 필센과 라이트 밖에 없다. 산미구엘은 레몬, 애플, 리치도 있는데 애플이 진짜 맛있다. (그리고 레드 호스라는 높은 도수에 묵직한 맛을 자랑하는 맥주도 강추한다.)


비치-바(beach bar)에 다다랐을 무렵 낯익은 모자와 선글라스를 낀 이반장님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반장님은 이미 산미구엘 드시고 계셨다. 평소에 이반장님은 맥주를 드시지 않는다. 오로지 소주만 그것도 23도짜리 빨간 뚜껑만 드시는 분인데, 검은 라이방 선글라스 끼고 병째 들이키고 계셨다. 이반장님은 잠시 바다에 취하셨다.


"아니! 이 반장님~~ 벌써 나와 계셨어요?~~ 어뗘? 바다가 볼만 혀?"

"응. 너무나도 좋다. 이게 다 너희들하고 엄마 덕분이다!"


이반장님은 계속 너희와 엄마 덕분이라는 말을 되뇌셨다. 처음 알았다. 이반장님은 독주는 잘 마셔도 맥주에는 한 없이 약한 남자였다. 


아쉽게도 칵테일 바에 산미구엘 애플은 없었다. 우리는 칵테일을 먹기로 했다. 바텐더에게 추천을 부탁했더니, 할인되는 몇 가지 칵테일을 추천해 주었다. 이름으로는 도저히 무슨 맛인지 상상할 수 없는 칵테일 시켰다. 맛은 정말 밍밍하고 이상했지만, 분위기에 취해 한번에 들이켰다.

언니들과 천천히 바닷가를 걸었다. 모래사장에  스르륵스르륵 발자국이 파였다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발바닥을 마사지하듯 꾸욱 꾸욱 밟히는 기분이 좋아 계속 걸어봤다. 뒤에 있던 이 반장님이 바지를 걷어붙이셨다. 그리고는 함께 바다로 천천히 걸었다. 이반장님은 마치 바다에서 누가 부르는 것처럼 계속 계속 앞으로 나아가셨다.


"아니! 이 반장님~ 누가 부르는거여? 왜 이리 앞으로 나가셔?!"

"나이 80세 물놀이가 체질인걸 이제야 알았네!"


나지막이 이 반장님께서 속삭이셨다. 그리고 또 처음 알게 되었다. 이 반장께서는 몹시도 물을 좋아하는 남자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쩌면 팔순 원정대의 절대 반지는 이 반장님이 처음 찾은 취향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만으로 이번 여행은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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