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7 이숭이의 하루

늘, 운명적인 타이밍

by 이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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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7일 일요일,
두구두구 체력 단련하는 날이 밝았다.
동물 온천 게임을 하느라 에너지를 쏟았는지 아침부터 피곤한 상태였다. 산에 가는 편안한 복장을 입고, 이 옷 저 옷을 마구 껴입었다. 흐리고 비가 온다고 하길래 추울까 봐 내복에 목티, 조끼, 후드...등등 누가 보면 겨울산행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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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아홉 시.
집에서 시부모님이랑 과일이랑 커피를 간단히 먹고 창녕으로 떠났다. 국도를 타고 가는 길은 알록달록 단풍나무들 세계였고, 지난번 강한 바람에도 잘 버텨준 나무들이 고마웠다. 나무 보랴 광고 보면서 동물온천 아이템 모으랴 나는야 멀티플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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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산 군립공원 주차장으로 가고 있었다.
어디로 갈지 의논을 하다가 내비게이션에 화왕산 억새밭이 나오는 걸 발견하고 노선을 변경했다. 나는 그 옆에서 물개 박수로 맞장구를 친다. 원래 목표는 차 타고 주차장까지 쭈욱 올라가서 수월하게 산을 타는 거였는데 어째 더 멀어지는 것 같지.. 스무 살 때 답사로 가본 곳.. 그 화왕산의 힘듦이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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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 코스 중에서 짧은 코스 선택은.. 그만큼의 고통과 맞바꾼다. 이름도 환장 고개. 나뭇잎도 보고 노래도 흥얼거리며 부지런히 걸었는데 갑자기 돌계단과 경사가 쭉쭉 나타나기 시작했다. 춥기는 개뿔.. 더워서 힘들다. 여기서 환장 파티를 열게 될 줄.. 심장은 쿵쿵거리고 다리 힘은 빠질락 말락, 끝이 보이지 않는 돌길. 600미터를 남겨두고 어떻게 올라왔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떠오른 기억은 13년 전 아찔한 그 코스대로 밟고 있는 게 아닌가.. 헉헉대며 올라왔던 그 길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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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까지만 해도 괜찮던 날씨가 이상하다.
점점 어두워지더니 정상에 도착하는 동시에 비를 뿌린다. 어바웃 타임의 대환장 결혼식 장면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반갑다고 환영한다고 비를 내리는 거라면 사양하고 싶은데... 넷이서 비를 맞으며 뚜벅뚜벅 걷고 억새를 배경으로 사진 몇 장을 찍는다. 비 때문에 오래 머무르지도 못하고 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평평한 자리를 잡고 김밥을 정신없이 먹었다. 오늘도 등장하는 막걸리도 함께 쭈욱 들이켠다. 참치, 고추장 불고기, 그냥 김밥을 종류대로 열심히 먹고 내려오는 길. 배가 불러서 기분이 좋은지 노래도 부르고 방긋방긋 신났다. ‘연리지’를 보며 얘기하다가 남편은 나를 보며 ‘이숭이 입이 연리지(열리지)’라고 말했다. 생리적인 욕구가 충족이 되면 바로 나타나는 이숭이의 상태. 일단 잘 웃고 말이 많아지고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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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올 때 안 미끄러지려고 발가락에 힘을 많이 줬는지 발이 아팠다. 미끄러질 뻔도 하고 엉덩이로 산을 내려올 뻔했다. 돌이 제멋대로 놓여 있어 다리를 쭉쭉 뻗어서 조심스레 딛는다. 어쩌다 보니 ‘화왕산 쩍벌녀’가 되거나 ‘옆으로 내려오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래도 억새도 구경하고, 산 정상을 찍고 내려왔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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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일정은 달성보에 가서 구경을 하고 염소불고기를 먹는 것. 차에서 정신을 놓고 졸다가 도착하면 눈을 뜨고 움직여본다. 처음 먹어보는 염소고기라 긴장했는데 소고기보다 부드러워서 맛있게 잘 먹었다. 몇 판을 구워 먹었더라. 양파랑 마늘을 입에 털어 넣었는지 지금도 냄새가 지독하다. 산에 올라가기 전부터 바지 후크는 힘겹게 잠궜는데 저녁을 먹고 나서는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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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자마자 세탁기를 돌려놓고 씻었다.
하루 종일 흘렸던 땀, 먼지를 씻겨내서 개운하고 상쾌한 우리가 되었다.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체력단련=산. 가을 산행도 무사히 잘 마쳤고 편안한 일요일 밤을 만끽하고 있다. 우리 둘 다 고생했으니까 자기 전에 발바닥을 꾹꾹 눌러줘야겠다. 동물온천 게임도 좀 만 더 하다가 자야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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