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운명적인 타이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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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6일 일요일,
[하루 늦게 쓰는 일기]
시부모님댁에 10시 반에 도착한다던 우리는 10시 반에 출발했지 뭐. 9시에 눈을 떠서 맘마를 먹이고 각자 씻고 챙기고, 나무 트림시키랴 놀아주랴 닦아주랴, 아기 짐들 챙기랴 바쁘다 바빠. 아기 짐 한 가득을 챙겨서 도착하자마자 분유포트 물 끓이고, 보행기랑 장난감들을 꺼내고 기저귀랑 맘마먹는 시간을 메모해두었다. 갑자기 시간이 생긴 시부모님은 아기를 봐 주시겠다며, 모처럼 단둘이 보낼 시간을 선물해주셨다. 어서 가라고 재촉을 하시고는 둘이서 신-나게 놀다 오라며 남편 손에 용돈을 꼬옥 쥐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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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생각과 후보들을 거쳐서 대구 시내를 다니기로 했다.
아기를 맡기고 다시 집에 와서 맛있는 거나 먹고 영화를 보기로 했던 우리. 그냥 늦잠자면서 아기를 보는 것도 괜찮아서, 원래는 딱히 어디 가고싶지 않은 상태였던 나였다. 더군다나 비까지 내리는 일요일은 더더욱 집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게 했다 (집순이에 길들어진 나). 좋아하는 경주, 하동도 생각났지만 아기를 떼놓고 먼 거리를 가는 것도, 궂은 날씨에 떠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바깥에 대한 의욕이 없었달까. 그냥 우리집이 제일 편하고 좋았달까. 그러다 우리가 좋아하는 햄버거랑 커피가 있는 삼덕동이 떠올랐다. 그래, 가 보자! 나무야 아빠 엄마 놀다 올게. 할아버지랑 할머니랑 잘 놀고 있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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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품고 왔던 곳에 둘이 와서는 햄버거를 기다리는 시간이 좋았다. 60년대의 미국 레트로 감성이 있는 곳. 음악까지 옛날같아서 꼭 그 시절로 돌아가 있는 기분이 들었다. 감자튀김 하나를 먹고, 햄버거 한 입을 먹고 그새 기쁨으로 꽉 차 올랐다. 맛있다! 맛있다!를 외치며 먹고 또 먹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순 없지. 오브젝트에 들러 귀엽고 이쁜 물건들을 구경했다. 이 곳만의 음악 분위기가 좋더라 난. 물기를 머금은 동네 골목 골목을 돌아다닌다. 연애시절, 결혼생활, 임신 중에 왔었던 추억들이 방울방울 떠 다닌다. 초록 이파리에 있는 물방울도 귀엽고, 풀꽃들도 귀엽고, 가게 앞에 흐드러지게 보다 넘치게 핀 장미들에 눈길이 가는 걸 보니 내 마음에 여유가 생겼나 보다. 그때 잘 놀고 있다고 걱정 붙들어 매라는 어머님의 카톡과 나무 사진 한 장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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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행선지는 봉산동.
우리의 아지트 롤드페인트에 들렀다. 내 방 한 켠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보물상자처럼 알록달록한 마스킹테이프들이 가득한 곳. 사장님이랑 짧은 담소를 나누고 멋진 작품들과 마스킹 테이프를 구경하면서 놀았다. 가 보고 싶었던 카페. 피플스커피는 피플들로 가득했다. 바깥 자리에 앉아 차 구경, 사람 구경, 커피 맛 구경을 하는 우리. 걱정없이 시간 계산하지 않고 커피 맛을 즐겼던 게 언제였던가. 아무튼 되게 여유로운 그 시간이 다시 그립네. (일기를 쓰고 있는 시점은 아주 현실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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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엔 동성로.
비를 뚫고 시내를 싸돌아 다닌다. 플랫슈즈는 이미 다 젖어서 난리가 났고, 질퍽질퍽 물 웅덩이에 들어가도 두려울 게 없는 발이었다. 얼마 만에 온 시내였더라. 여기는 언제나 사람이 많구만. 젊은이들이 가득한 곳에 나도 있으니 괜히 조금 젊어진 것 같고 좋네. 회춘..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려나. 뭘 사지 않아도 구경만으로도 좋았는데, 쇼핑하니까 더 좋네? 아이참. 내가 가자는 곳에 함께 가주는 것만으로도 참 고마운데, 우산도 들어주고 참 감사한 사람. 이 남자랑 데이트를 하는 이 시간이 정말 소중해. 마지막 장소는 원조아삼겹살. 옛날부터 먹어보고 싶었던 곳인데 좀처럼 기회가 나질 않았던 곳. 뜨거운 돌판에 꽃처럼 생긴 삼겹살을 맛있게 구워준다. 순간 소주나 맥주의 유혹에 넘어갈 뻔했지만 같이 못 먹으니까 사이다로 건배! 볶음밥까지 먹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가게를 나왔다. 두근두근 이제 아기보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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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면서도 자주 생각나는 우리 아기.
부지런히 사진을 꺼내어 보았고, 틈만 나면 우리의 대화 속에 나무가 들어가 있었다. 그만큼 우리에게 큰 존재인 아기. 오늘 어떻게 보냈을지, 잘 먹고 잘 놀았는지 모든 게 궁금한 엄마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머님이랑 꿈나라로 떠난 나무. 낮잠 아닌 저녁잠을 자고 있어서 일부러 깨웠다. 우리가 가고 나서 잠투정하느라 20분은 세게 울었다고 했다. 엄마 품을 찾은 것 같아 고맙고 좋고 짠한 마음이 동시에 올라온다. 그래도 맘마를 다 비우고 잘 놀아서 한껏 예쁨 받은 나무는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을 독차지 했다지. 다시 집으로 가볼까. 오자마자 나는 나무 목욕을 시키고 남편은 짐 정리를 했다. 9시 반에 집에 왔는데 다 치우고 씻고 한숨 돌리니까 11시가 됐네.. 12시.. 1시. 오메. 그나저나 우리 나무는 왜 안 자니. 언제 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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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고 돌아다닌 둘만의 시간도 소중했고
셋이 된 이 밤도 참 소중하네.
아기를 잘 봐 주신 시부모님도,
내사랑 남편도 아기도 모두 모두 감사해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