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19 이숭이의 하루

늘, 운명적인 타이밍

by 이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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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9일 수요일,

아기는 1시 넘어서 잠들고..

일기를 다 적고 나니까 2시가 넘었다. 20대 땐 줄곧새벽에 자고 그랬는데, 아기와 함께하는 순간부터 새벽이랑 친해졌다. 하루 중 제일 피곤한 시간이 나에게 주어진 최고의 자유시간이었음을. 무얼하든 밤을 붙잡고 싶지만, 밤샘을 해도 괜찮았던 체력과는 너무 동떨어졌다. 골골골하겠지.. 아기는 새근새근 잘도 잔다.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또 보고. 언젠가 아기가 있는 사람들에게 ‘아기가 있는 삶’은 어떠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공통적으로 다들 하는 말 ‘힘은 들긴 하지만 너무 예쁘다’고. 그래 맞아. 참 예쁜, 사랑스러운 존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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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도 피곤했나 보다.

배가 홀쭉해졌는데도 깨지 않는 것 보면. 거의 10시간 만에 먹는 맘마는 180ml. 40ml도 못 먹어서 남기던 신생아였는데 언제 이렇게 커서 4~5배 가까이 먹니. 하루하루 크는 게 눈에 보이는 아기의 모습. 5개월하고 14일(165일)되는 날. 뒤집기는 식은 죽 먹기였고 엎드려서 엉덩이를 최대한 높여 배밀이를 하려고 했다. 눈 앞에 보이는 곳을 향해 방향도 이리저리 잘 바꾸고, 엄청난 꿈틀거림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흡사 꼭 자벌레같다. 긴다고 하기에는 어쩌다 보니 앞으로 간 것 같지만, 배 힘도 제법 많이 생겼다. 그리고 오늘은 딸랑이를 쥐고 위에서 아래로 흔들고 탕탕탕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직 힘 조절이 안 돼서 꽤 공격적이지만 물건을 다루는 방법을 하나씩 익히고 있었다. 그러다 얼굴을 때리고, 이마를 때려서 우는 건 짠하고 귀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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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 상자를 열었다.

해야할 일이지만 귀찮았던 일. 옷장에 겨울 옷과 봄옷을 정리하기로 했다. 신박한 정리까지는 안 되더라도 안 입을 옷은 좀 버려보자. 아가씨 때 입은 옷을 버리지 못 하는 건 추억보다는 지금보다 너무 날씬했던 몸에 대한 그리움이겠지. 몇 년을 지켜보고 보관했지만 입을 수가 없네.. 그럼에도 다 버리지 못 했다. 오랜만에 옷장이 숨을 쉬는 것 같았다. 겨울옷 들어가고 여름옷이 나오는 순간 다시 한숨이 푹 나오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아기옷, 우리 옷, 원피스, 수건 빨래만 해도 4번 돌아가는 세탁기와 쉴 줄 모르는 건조기. 내일은 산더미처럼 쌓인 여름 옷을 빨아야겠다. 휴우. 그나저나 사라졌던 옷걸이가 여기에 다 있었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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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으로 떡국을 먹고 지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커피였다.

집 가까이 스타벅스가 있는데도 잘 안 가던 곳. 예전에 비해 자주 가는 편이지만 적립이나 프리퀀시 그런 거는 아무 것도 모른다. 세련되게 사이렌오더 좀 해 보려고 호기롭게 시도했다가, 앱을 깔고 로그인까지 하고 나서 헤매는 우리 둘. 결제는 어떻게 하는 거더라. 머리를 맞대고 쿠폰 사용을 해 보려다가, 결국은 가서 주문을 해서 사 왔다고 한다.. 먹고 싶던 민트초코도 케이크가 없단다. 남편은 초코, 나는 돌체라떼를. 블루베리 카에크를 먹으면서 떨어진 당을 보충했다.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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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도 집안일은 계속 됐다.

당근마켓에도 올리고, 서랍장 정리, 아기옷 정리까지 했다. 작아져서 못 입는 아기옷을 지인에게 주려고 골라내는데, 혼자 꽤 오랫동안 추억에 잠기고 말았다. 옷 하나하나마다 아기 모습이 눈에 아른아른거려서 찬찬히 시간을 보낸다. 배냇저고리를 입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 쪼꼬미 양말은 이제 들어가지도 않네. 나중에 태어난 아기가 잘 입어주기를 바라며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리고 우리는 산책을 나갔다.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바깥. 선선한 바람과 함께 나란히 걸었다. 남편이 유모차를 끌고 처음 나간 특별한 날. 잔잔한 행복이 우리 곁에 머물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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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마자 목욕을 시키고, 아기 맘마를 먹이고 그제야 우리도 배를 채웠다. 밤 9시 반, 돈까스를 사이좋게 맛있게도 먹었다. 열심히 먹고 있는 나를 스윽 쳐다보는 나무. 곧 시작할 이유식을 위해, 미리 숟가락에 분유를 떠 먹여봤다. 입을 벌리는데 빨아들이지 못 해서 줄줄줄 흘린다. 몇 번을 계속 하니까 흘리긴 해도 제법 잘 먹더라. 아기 새처럼 입을 쫙쫙 벌리는 것만으로도 아주 작은 희망을 가져본다.. 아기는 자고 11시 반에 자유인이 된 우리. 손톱발톱을 깎고 남편은 요즘 흠뻑 빠진 필기체 쓰기 연습을, 나는 일기를 쓰는 이 밤이 참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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