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시 마주친다면 나도 마주보며 씨익 웃어주겠어요.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난 나는 꽤 오랜 기간 향수병을 앓았다. 챙겨간 김치, 사발면은 이미 동난지 오래였고 유럽 특유의 짜고 느끼한 음식은 아무리 할라피뇨와 함께여도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그날은 굉장히 오랜 시간 밤을 가르며 달리는 국경을 넘는 아갼버스를 타는 날이었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스페인 세비야행 야간버스에 내 몸만한 짐과 함께 나도 같이 실었다. 심야버스는 아주 오래전 어릴 적에나 탔던 일반 고속 버스형태였다. 비좁은 좌석의 간격과 먼지로 가득한 공기가 기억에 선명하다. 다행히 심야버스여서 그런지 여행객이 많이 없었다. 있어도 나와 같은 한국인 트래블러들 정도. 낯선이지만 한국인이라는 소속감으로 다닥다닥 붙어 앉아 불편한 자세로 장장 16시간을 달렸다. 그리고 어슴푸레 해가 고개를 빼꼼 내미는 시간, 오전 4시 30. 세비야를 마주했다.
17시간이라는 비행시간 답게 28kg을 자랑하는 큰 캐리어 하나와 배낭 하나를 이고 버스터미널부터 숙소까지 약 40분가량 걸었다. 피곤에 무너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세비야의 새벽공기를 마시며 천천히 걸어가면 보았던 풍경은 2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다. 이른 오전의 한강의 분위기와 다를 바 없다. 줄지어 런닝하는 청년들, 술에 취해 이제야 비틀거리며 집으로 걸어들어가는 젊은 무리. 내가 사는 곳과 다른 것은 사람들의 언어, 생김새 그리고 길거리의 담배 꽁초 개수 뿐이었다.
비틀대며 도착한 세비야의 숙소는 새벽5시 30분 오픈이었다. 5시 언저리에 도착한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한국인 일행들도 보였다. 어찌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주친 한국인은 그렇게 반가울 수 가 없다. 같이 짐을 맡기고 런드리 룸에서 빨래를 돌리며 컵라면을 먹었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역시 의지의 한국인이라고 한창 유행했던 라면 끓여먹는 전기포트를 가져온 한국인 부부가 기억에 선명하다.
라면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피로는 뒤로하고 세비야 광장으로 향한 나는 볼리비아의 방랑자들을 마주쳤다. 내 가방 속 지갑을 훔치려다 귀를 간지럽히는 지퍼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씨익 웃고 있었던 두 명의 여성. 그러나 그들이 훔쳐간 것은 훼이크로 만들어둔 손지갑과 그 안에 들어있던 치실뿐이었다. 세비야의 새벽이 나에게 남겨준 아무렇지 않게 씨익 웃던 두 여성의 표정이 선명하다. 동그래진 내 눈동자에 담긴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나를 지나갔고 황망히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하나의 파편처럼 내 머릿속으로 주워담았다.
그러다 우연히 바라본 세비야 광장의 성은 왠지 전생 어디쯤 내가 한 번은 와봤던 듯 친숙하면서 웅장했다. 같이 있던 일행들에게 "나 전생에 여기 살았나봐. 익숙하네." 라고 말을 건네었는데, 이내 곧 황당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동자안에 비춰지는 내 얼굴을 보며 머쓱해져 머리를 긁적였다. 그 즈음 동이텄고 우리는 영양가는 없지만 뜨뜨미지근한 온도의 언어들을 나누며 숙소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누가봐도 여행자 행색인 우리를 스쳐가는 오전 8시의 세비야는 직장인들, 고등학생 그리고 때 마침울리는 성당의 종소리 그리고 스쳐지나가는 볼리비아의 방랑자의 얼굴의 잔상에 나는 되뇌었다. 우리가 다시 마주친다면 나도 마주보며 씨익 웃어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