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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준 Mar 22. 2019

나는 단수가 아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소설에 나온, 그 유명한 대사다. 사실 지금 돌이켜 보면 유치한 구석도 많은 소설이지만, 그 때의 감성과 그 때의 기억을 돌이켜보자면 내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 소설임에는 틀림이 없다.


최근 들어 소설 속 대마법사가 했던 말, '나는 단수가 아니다.' 라는 말이 문득 생각나는 순간들이 있어, 다시금 이 말을 곱씹어 보고 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 는 문법적으로는 단수(Sigular)이지만, 작가(혹은 대마법사 핸드레이크, 혹은 네크로맨서)의 해석으로는 여러가지 복합적 의미를 가지는 존재로써 오롯하게, 혹은 유일무이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좀 더 풀어 쓰자면, 학생으로서의 나와 회사원으로서의 나, 아버지로서의 나와 동료로서의 나 등이 모두 존재하는 '나' 인만큼, 이들을 모두 묶어 단수 형태로는 표현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의 '나' 는 인간이고, 중세 판타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니만큼 인간의 대척점엔 드래곤이 있다. 드래곤은 완벽하고 오롯하고 유일무이한 존재로써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세계에 존재한다.


아무튼, 내가 갈수록 느끼고 있는 건, 내 자신도 그렇고, 세상도 그렇고, 단수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이 쪼개지고 또 쪼개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나를 포함해 내 또래 주변의 사람들은 그것의 시차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그것이 이른바 후기 밀레니얼 세대의 시대정신으로써 본능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지만, 그 자신들도 세상을 그렇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에 익숙해지지 못했다는 느낌이 든다. 오히려 포스트 밀레니얼 세대는 그러한 시선과 함께 태어나 자연스럽게 세상을 살아가는 비중이 높지만, 현재 나, 그리고 나의 또래 친구들은 늘 '내가 이래도 될까?' 라는 의문을 체한 떡 처럼 마음 속 어딘가에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이야기를 듣거나, 내가 그러한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앞서 말한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의 말이 종종 떠오른다. 나는 단수가 아니다. '나' 로써 존재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삶은 전부 다 진짜 나라고 생각해 버리려 한다. '나' 는 어차피 어떤 고정된 형상으로써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지금 글을 두드리는 이 순간에도 조금씩 변하고 있으니 이 모두가 진짜 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가 스스로도 찾지 못하는 어딘가에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그렇게 많다고 한다.- 본체를 두고 끊임 없이 가짜를 양산하는 존재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최근 어떤 대화에서, 나의 구체적인 목표에 대해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답변의 퀄리티 여부를 떠나 나 스스로도 이러한 질문에 대답을 하고 싶어 곰곰히 생각을 해 보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목표보다는 방향성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 방향성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나' 는 분명히 지금과 수 없디 다른 나로써 길을 걸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형태의 삶들을 내가 만족할 정도로 충실하게 살고 싶다. '이래도 될까?' 라는 질문에 대답할 필요 없이, 그 중에 진짜 나는 무엇이고, 가짜 나는 무엇이고를 가릴 것 없이, 그 삶들에 충실할 수 있다면, 그거면 된 거 아닌가 싶다. 왜냐면 어차피 다 진짜 내 삶들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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