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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드리기

날 위해.

by 지원준

약간 취한 밤이면, 늘 뭔가 쓰고 싶어진다. 적당히 조용한 음악을 찾아 걸어놓고, 혹은 아무 음악도 없이 조용한 집 안에서 빈 화면에 깜빡거리는 커서를 마주하면 뭐든 쓸 수 있는 것 같은 용기와 아무것도 쓸 수 없을 것 같은 답답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그래서 잡담과 단상 카테고리는 늘 그 때의 내 기분을 묘사하는 글들로 주절주절 시작한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이영도 씨는 본인을 타자, 그러니까 '두드리는 사람' 이라고 늘 칭했다. 그 말을 보곤 썩 마음에 들어서 나는 두드린다는 표현을 좋아하게 되었다. 현대인의 글은 보통 쓰이지 않고 두드려 지니까.

좋아하는 음악, 혹은 정적을 배경음악 삼아 청축 키보드가 내는 경쾌한 타격음을 들으며 글을 두드릴때면 기분이 흐뭇해진다. 특히나 평소에 자주 쓰는 IT 나 제품 관련 글이 아닌, 말랑말랑한 글을 쓸때면. 이렇게 쓰는 글은 정말로 온전히 '내 것' 이라는 느낌이 좀 든다고나 할까. 지금 느끼는 기분과 표현하고 싶은 느낌을 한 글자 한 글자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단어로 깎아가는 느낌이 참 좋다.

최근엔 책을 좀 더 읽고, 언어를 더 배우고 싶어졌다. 더 많은 것들을 내가 더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될테니까. 특히 요즘 은희경 작가의 중국식 룰렛을 읽고 많이 감탄했다. 어쩜 그렇게 인물들의 처지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글로 써보고 싶은 주제들도 길을 걷다 꽤 많이 떠오른다. 주로 별 것 아닌, 생활의 무지무지 사소한 포인트들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 회사 앞의 횡단보도 같은. 우리 회사 정문으로 들어가려면 횡단보도 두 개를 건너야 하는데, 둘은 30-4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첫 번째 횡단보도의 불이 바뀌어 건너자마자 40미터 떨어진 두 번째 횡단보도의 불이 바뀌어 버린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은 선택을 해야 한다. 뛸 것이냐, 천천히 걷고 다음 신호를 기다릴 것이냐. 비단 우리 회사 사람들 말고도, 같은 건물, 혹은 같은 블록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선택의 딜레마에 빠진다. 나는 이 횡단보도가 참 재미있다고 느껴져서, 언젠가 좀 더 이야기를 써 볼까 하는 것이다.

2016년은 여러 글들을 두드리고 참 많은 것을 얻었다. 2017년도 더 두드려 볼 예정이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지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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