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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희 Dec 26. 2023

나이 먹는 소리

나이

    당연하게도 매년매년 20년 전은 점점 더 가깝고 선명해진다. 어쩌면 나이가 가진 숫자만큼 인생의 속도가 빨라지는 게 아니라 그 숫자만큼 과거가 천천히 멀어지는 걸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을수록 과거에 더 많은 미련을 두고 보다 오랫동안 놓지 못한 채 붙잡고 살아가기에 과거가 가깝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과거의 시간이 나에게 역행해 오듯 달려들 던 요 몇 년, 그 현실을 외면했다. 20년 전은 마다하고 10년 전조차 돌아보는 일을 두려워했다. 자칫 10년 전이 더 이상 미성년자가 아닐까 봐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을까 봐 철저히 시선을 회피했다. 앞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현재 내리꽂는 발끝만 바라보며 걸었다. 숫자에 애써 둔탁해지는 순간이었다. 일종의 정신승리 같은 뭐 그런 거랄까.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치더라도 시간은 흘러갈 뿐이고 그렇게 끔찍이도 외면했던 만 29살이 되고야 말았다.  



   기억을 더듬어 되돌아보면 나이로 받은 충격의 첫 번째 기억은 16살 중학교 3학년 체육시간 때였다. 틈틈이 떠들기 쉬운 수업 체육시간, 그날의 주제는 어릴 적 보았던 추억의 만화를 떠올리는 거였다. 추억놀이에 한껏 들떠 신이 났는데 문뜩 생각해 보니 그게 10년 전 일인 게 아닌가. 머리를 한 대 쿵 맞은 거 같았다. 10년... 10년 전 기억이 너무나도 선명하다니! 그때 그 충격은 10년이라는 숫자에 꽂혀 있었다. 당시 내게 10년 전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란 엄마 아빠만큼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그 능력이 나에게도 존재한다니,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당황스러운 충격이었다. '나이를 이렇게나 많이 먹었다니...' 그다지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게 벌써 십 년 전 일이다.'라거나 '그게 십 년 밖에 되지 않은 일이다.'라는 등 어른들이 10년을 스스럼없이 언급할 때면 여전히 그건 어른의 세계라고 생각했다. 문장 속에 들어있는 감정은 추측조차 할 수 없는 말이자 기분이기 때문이었다. 분명 나에게 10년은 '벌써'도 아니고 10년 '밖에'도 아닌 아주 먼 옛날 어릴 적 이야기 같았다. 그 차이가 주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 당시 아마도 나는 젊거나 어린 나를 좋아했던 거 같다. 콕 집어 무엇이 좋은 건지는 증명해 보일 수 없었지만 말이다.      



   20대 초반에도 나는 내 20대를 사랑했다. 옛날옛날 어릴 적 이야기가 유아기가 아닌 10년씩이나 된 초등학생 시절 이야기인 것에 충격과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괜찮았고, 중학생 때 이야기가 얼마 되지 않은 이야기가 아니라 오래된 이야기처럼 체감이 될 때에도 세월이 신기하고 충격적인 건 다르지 않았지만 슬퍼도 슬프지 않았다. 20년 전에도 어른이었던 엄마 아빠를 생각하면 말이다. 20대, 나는 내 젊음과 어림을 사랑하고 즐겼다. 그리고 그 사실이 참으로 좋았다. 그래서인지 다가올 나이에 대한 동경보다는 지나가는 나이를 아쉬워하고 붙잡고 싶은 마음뿐인 날들이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나. 다가올 현실을 앞서 걱정하고 두려워하다가 막상 현실이 되어보니 그런 두려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허무한 그런 때. 만 29살이 되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추켜들고 앞뒤 좌우의 현실을 맞닥뜨리니 막상 예상과는 달리 감정적으로 맨땅에 푹 주저앉아 절망하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나이가 드는 일이 어느 부분 좋은 감정도 있다는 걸 피부로 알게 되는 예상치 못한 이해만 생겼을 뿐, 이는 분명히 정신승리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만 29살이라는 나이를 지난 과거의 나이들처럼 좋아하는 거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 시절 나의 젊음을 여전히 그때와 같이 사랑하고 있었기에 괜찮았다. 그 시절 듣던 음악과 그 시절 좋아했던 연예인 그리고 문화들, 그 기억의 소환이 무료한 현재를 채워내는 진귀한 경험을 한다. 어쩐지 10대 시절 유치원 때 보았던 만화와 그 주제가를 떠올리는 것과는 다르게 또 다른 어떠한 감정이 나를 채워낸다.



   유난히 10대 시절 문화가 가슴에 남다르게 남아있는 건 어쩌면 그 시절 즐겼던 문화가 현시대 문화의 전부라고 생각했기 때문 일 지도 모른다. 우리의 문화 혹은 우리에게 가장 인기 많은 연예인 등을 모른다는 건 뒤처지는 사람이자 촌스러운 사람이라 단정 지어버리던 시절, 어른들의 문화는 다 과거의 것이고 우리가 열광하는 모든 게 세상의 중심이자 전부라 생각했던 거 같다. 그건 이제와 실로 대단한 착각임을 알게 되었지만 착각 속에서 과하게 우려내버린 감정들 덕에 만 29살이 되어서까지 그들이 특별한 진가를 발휘하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나 그리고 우리 세대만이 아는 문화와 감정이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특별한 일이다. 그건 그 시절을 지나와야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특히나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줄 알았던 착각 속에 그 시기에만 뿜어 낼 수 있는 풍부한 감정을 마구 뿜어내면서 느끼고 나눴던 그 어떤 감각들, 이는 설명만으로는 나눌 수 없는 한정된 인물들에게만 부여받는 감각들이다. 물론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거나 그 문화가 다시 세상을 제패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약간의 그리움과 잊힌 듯 잊히지 않은 감정들을 얻게 된 건 나이가 준 삶의 풍부함이 아닐까. 저 젊고 어린 10대 아이들은 지금 현재 자신의 문화가 인생의 전부일테지만 한 단계를 지나온 나에게는 그때의 문화도 현재의 문화도 다 내가 누릴 수 있는 예술이자 감각이라는 사실이 감정이 닫히거나 도태되어 촌스러워지는 게 아니라 보다 풍성짐을 느낀다.   



   10대 시절 어느 한 시기엔 한창 7080이라는 말이 유행을 했었다. 7080 음악이 우리가 보는 TV 예능 프로그램에 스멀스멀 자꾸만 등장하는 게 아닌가. 그 현상을 겪으며 왜 저렇게 7080을 외쳐 되나 생각했던 게 떠오른다. 그때 음악이 또다시 TV에 등장하는 일 그리고 우리 세대에까지 스며들어 함께 흥얼거리는 그 현상이 7080 세대에게는 얼마나 설레는 일이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같은 음악을 흥얼거렸다 생각했지만 그 감정은 전혀 다른 감정이었을 것임을 이제와 어렴풋이 추측하게 되었다. 그리고 7080 그들이 10대였던 우리보다 얼마나 더 값지고 아름답고 깊고 세련된 감정으로 지나왔을지도 말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마냥 나쁘지만은 않다는 말이 아마도 많이 산다고 세상이 더 쉬워지는 것도 세상을 다 알게 되는 것도 절대로 아니지만, 단 하나, 추억 때문에 다 괜찮은 어떤 날이 존재하기 때문인 거 같다. 그나저나 이 말, 참 나이 먹었다. 아직도 젊은 게 분명 하나 너무 젊고 어리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해 버린 기분이 드는 글이다. 기분 참, 묘~~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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