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남녀 사이 친구가 가능할까?' 이 화두에 대한 나의 생각은 주로 가능하다였지만, 때때로 불가능한 거 같기도 했다. 이따금씩 감정의 미묘한 경계가 아릿 송한 혼돈의 세계로 몰고 가 곤 했다. 어쨌든 요 며칠은 가능하다에 무겁게 기울기를 두었다. 흔들흔들 잔 떨림이 심한 그래프가 지금은 가능하다 편에 깊이 선을 긋는 그런 주기가 돌아온 거다. 그런데 어느 때보다 요즘 이런 마음이 꽤 분명히 자리하고 있는 건 요 며칠 자주 떠올리는 한 가지 가정 때문인데, 이 가정에는 사랑스러운 내 동성 친구들이 있다. 그들은 지금 당장 연락해도 낯설지 않은, 지금 현시점에 현존하는 동성친구들이며, 그 관계의 농도도 꽤 다양하다. 10년이 훌쩍 넘은 애, 10년이 다 되어 가는 애, 알게 된 지 몇 년 안 되었지만 한창 친한 애 등등. 모두 좋아하는 사람들이고 때때로 내 인생보다 더 잘되어도 좋다,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자 내 것을 희생해서 다 퍼다 주어서라도 그들이 아프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는 마음이 그리 어렵지 않게 드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이성이라 가정한다면? 이성애자인 내가 그들을 이성으로 바꿔놓고 그들과 사귀겠는가 상상한다면, 난 'NO'를 외친다. 그러니까 난 그들과 친구는 될 수 있어도 내 연인은 될 수 없겠더라니. 그렇다면 이성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남녀 사이 친구 가능?'에 'YES'를 외치는 바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자. 내 것을 다 퍼줄 수 있을 만큼 애정을 한다면, 또 나보다 잘 되어도 좋을 순간들이 있고 나보다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러나오는 대상이라면, 우린... 아니, 적어도 난 사.... 랑?, 사랑이 아닐까? 하지만 왜 그들과 연인은 될 수가 없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중에서 극명하게 떠오르는 하나는 ‘너무 알아서’ 일거란 추측이다. 나의 그들은 들여다보면 다 진국인 사람들이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움과 진국 속에 감추어진 그들의 모남, 그 모남에 찔려 생겨버린 감정과 그 복잡함을 안고 지나버린 많은 울고 웃고 분노하고 비난해 버린 사건과 시절들. 그게 우리 관계에 쓰인 문학이자 시작하는 연인이나 부부가 될 수 없는 이유이리라. 너의 찌질함과 구질구질함에 키스를 할 수는 없겠다.
"내가 좋아하는 것 같은 사람들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 불편한 구석이 있어요. 실망스러웠던 것도 있고, 미운 것도 있고, 질투하는 것도 있고, 조금씩 다 앙금이 있어요. 사람들하고 수더분하게 잘 지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중략)........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중.
삶은 하루단위, 한 달 단위, 일 년 단위, 그리고 십 년 단위로 잘라 생각하고 정리하고 다짐하기 마련이다. 1년 그리고 10년을 정리하는 이 시점에서 머리에 가득 찬 생각은 꽤 슬프다. 잘해보고자 잘 살아보고자 애써 온 것이 결국은 어느 곳에 미운 모습으로 안착했다는 사실이 슬펐다. 내 노력이 내 확신이 실패라니. 나는 얼마나 못나게 살아온 건지, 얼마나 어리석은 것들을 옳다고 믿으며 고집해 왔는지. 선명했던 이 세상이 참 어려워지고 어둑해졌다. 그리고 그 사실이 또 미웠다. 그건 이토록 이해할 수 없게 만들어 놓은 세상도, 엉뚱하게 최선을 오~래도록 다해버린 나 자신도 아닌, 바로 나의 그들에게 말이다. 내 의도를 왜 해석하지 못하는지, 내 상태를 왜 해석하지 못하는지, 가까운 사이라면서 왜 나를 흠집 내는지 그리고 미움의 말미에는 왜 나를 알지 못하는지에 대해... 그리고 곧 나 역시 그들을 해석하지 못하고 알지 못해서 또다시 그들을 흠집 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놈의 인간이란 동물은 결국 자기 자신 밖에 모른다.) 그러고는 나의 어리석은 최선: 마음을 다해 나를 보호하고, (애정이 있어) 마음과 최선을 다해서 그들에게 (마음속으로) 분노해 버린 나의 최선. 그 최선이 지금도 어느 한 구석에서 발휘 중이며 그에 대한 결과 값이 미래 저 어딘가를 향해 -ing형태로 정처 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 즉, 지금도 실패를 정처 없이 흘려보내고 있음이 해석되었을 때, 그만 풀이 켁하고 꺾였다. 젠장.
그들을 투명하게 사랑했다 생각했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진실에게 추궁에 추궁을 거듭해 보면, 난 마음 한 편 그들을 미워한다. 한 명도 빠짐없이 미워하는 중이다. 진국인 걸 알면서도 그들의 프러포즈를 받아 줄 수 없을 만큼. 그리고 미움 뒤에 숨겨진 진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 역시 잘해보고자 각자의 방식대로 마음과 추파를 열심히 던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 보다 (의도치 않게) 닿아버린 뾰족함이 나에게는 더 커서, 스스로가 더 귀하고 커서, 그 사실을 저 깊이 덮어두고 그들을 미워했다는, 미워한다는 사실. 결국 우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하고, 각자의 방식대로 해석하고, 각자의 마음에 미움을 품었다. 실은 ’너무 알아서 ‘, 하다못해 서로가 조금씩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이젠 너무 알게 되어서 말이다.
심호흡이 필요할 때다. 후욱! 하고 크게 두어 번 정도. 내가 가진 미운 마음과 그들이 가진 미운 마음에 대해. 그리곤 기꺼이 치를 대가와 사과 그리고 용서를 위해 서로 아량을 넓혀 그 넓이에 서로를 채워야겠다. 무언의 찰떡호흡이 필요하다. 과연 누가 텔레파시를 받을 것인가. 앞으로 10년이 증명해 줄 일이다. 추앙, 그것에 애써 볼 10년이 될지도 모르겠다.
사진출처: 드라마 나의해방일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