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윤희 Mar 12. 2023

틀려도 괜찮다는 틀리지 말아야 할 주문.

드라마 <스타트 업>

   여행은 좋아하지만 계획 짜는 건 싫다. 계획 짜는 건 싫어하지만 누가 마음대로 짜 준 패키지여행도 선호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를 사수하면서도 새로운 장소로 떠나는 여행은 하고 싶다. 사수하고 싶은 자유에는 정신적 자유도 포함인데, 난 어떤 걸 조사하고 계획 짜는 일을 싫어한다. 이쯤에서 단전부터 이런 말이 나오지 않는가? 그럼 어쩌라고?! 허황되더라도 정말 간절히 바라건대 그냥 슝- 하고 여행지로 날아가 처음 온 그곳에 어떤 것이 있고 어떤 문화가 있으며 어떤 디테일을 알아야 하는지 여행 신이 강림한 듯 알고 싶다. 신이 주신 영감에 의해 그 순간 가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가고 싶은 마음. 하지만 아직 비범해지지 못한 나에게는 일상으로부터의 자유와 새로운 자극으로부터의 쾌락을 얻기 위해서 감수해야 할 스트레스와 불편함이 있음을, 무엇이든 다 좋은 건 없다, 대가가 따른다는 믿고 싶지 않은 진리만이 선명히 남을 뿐이다.  


                    

   사전 조사라는 스트레스 외에 모든 면에서 자유롭고 싶었기에 한순간 급작스럽게 혼자 떠났다. 무려 1주일치 여행에 비행기표와 2박 3일 숙박만을 예약해 둔 채. 급작스러웠기에 벼랑 끝에 몰린 사람처럼 관광명소와 교통수단 정보 등을 이곳저곳에서 끌어 모아 구글맵에 대충 저장해 두었다. 하지만 언제 어디에 갈지, 효율적인 동선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짜 두지 않았다. 의도는 없었다. 단지 그렇게까지 짤 위인이 못되었을 뿐. 행복하려고 하는 일에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에라이 출발이다! 그렇게 포르투갈로 떠났다.           



   휘뚜루마뚜루 대량의 정보 (실은 최소한의 정보)를 싸들고 떠났더니 머릿속에 아는 것도 정리된 것도 하나도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은 모르겠고 비행기가 무사히 도착해 저녁 즈음 포르투갈 땅을 밟았다. 자, 시작. 숙소 주소를 찍고 멋지게 우버를 불러서 타고 갔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주소지에 맞게 도착했는데, 동네 분위기도 좀 꺼림칙하고 흥 넘치는 흑인들이 대다수였으며, 숙소에 도착했을 때 역시 투수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죄다 흑인이었다. 그들은 나를 낯설게 쳐다봤고, 흑인이 낯설었다기보다 죄다 흑인인 기분이 낯설어 낯설지 않은 척했지만 나 역시 그들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몸을 긴장시켰다. 게다가 연락처만 남겨둔 호스트에게 방을 받기 위해 연락을 하니, 아니, 내 이름이 예약자 명단에 없다는 게 아닌가. 이 모든 황당한 상황과 짧은 영어라는 작고 초라한 능력치까지. 어떻게든 된다 자신 있게 출발한 여행이 무색하도록 도착하자마자 겁이 나 심장이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침착한 척 급히 메일에 들어가 예약번호를 찾고 있는데, 호스트는 방이 남아있다며 가격과 함께 방을 소개한다. 상황이 안 되면 그렇게라도 해야겠지만 상황 판단과 돈 계산 그리고 예약번호를 뒤지는 일까지... 겉은 평온해 보였을지 몰라도 속에서는 온갖 경우의 수와 끝없이 펼쳐지는 상상력에 정신이 점점 더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집에 가고 싶다.’         

 

   이 모든 건 숙소지의 정보 오류도 예약오류도 아닌 아무것도 제대로 정리해 두지 않고 간덩이만 큰 내 탓이었다. 시설과 가격이 적당하다 생각되는 여러 곳을 저장해 두고 우범지역을 조사한 뒤에 숙소를 예약하는 철저함을 보였지만, 마지막으로 예약한 숙소를 정확하게 재 표시해 두지 않았을뿐더러 어느 숙소에 최종적으로 예약했는지 정확히, 정확-히 '다르게' 확신해 버린 탓, 이 정도쯤은 기억할 거라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다음 단계의 작업에 게을렀던 탓이었다. ‘이 여행 이대로 무사한가.’      


    

   다행히 숙소 위치에 착오가 있음을 이해하고 예약한 숙소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하지만 놀란 가슴을 안고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 앞으로의 일정을 각 잡고 제대로 짜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저 침대에 누워 ‘내일은 어디에 가지?’ 구글지도를 구경하며 대충 갈만한 곳을 훑어본 뒤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제일 먼저 어디 가지?’하며 눈을 떠 누운 채로 그날의 기분을 감지할 뿐이었다. 게다가 아점으로 먹을 만한 곳도 그제야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반복적인 매일의 밤과 아침을 맞는 1주일을 보냈다. 그런데 그러고도 ‘이 일주일, 바라는 바 대로 마냥 자유롭고 행복하고 순조로웠던가?’ 음... MBTI J에게는 아니었겠지만, P에게는 그랬던 여행이었다. 자유롭고 행복하고 순조로웠다. 아무 시간에나 눈을 떠서 아무 시간대에 밖으로 나가 정처 없이 다니며 시행착오를 겪는 일, 이게 현실을 탈피한 진정한 여행 아니겠는 가. 하지만 이따금씩은 스스로에게 실망(?) 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마음 편히 마음대로 하라고 두니 이렇게나 실수가 많단 말인가. 평소에도 섬세한 정확도를 가진 인물은 아니었으나 어찌 이 정도 일 수가 있단 말인가. 웃겨하다가 나답다 여기다가 오로지 나를 위한 여행인데 틀려도 괜찮다 하다가 슬슬 화가 밀려왔다. '후! 뭐가 이렇게 정확한 게 없고 왜 이렇게 생겨먹은 거야?' 자꾸만 선명해지는 스스로의 캐릭터에 즐겼다 타박했다 다독였다 힘냈다 지쳤다 수십 개의 감정과 맞서며 포르투갈의 경사길을 오르락내리락했다.



   포르투갈의 지대는 경사가 심해 등산 여행과 닮아있다. 그러니 애써 찾아간 카페가 문이 닫혀 있을 때는 그 허탈감이 다른 여행보다 크게 다가온다. 반면 오르막길의 장점이 있다면 어떤 뷰가 발견되기까지 그러니까 도착되기 직전까지 그곳을 볼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도대체 뭐가 있기에, 이렇게 까지 가서 봐야 해?' 싶다가 길 끝에 극적으로 심쿵하고 만다. 가슴을 설득시킬 멋진 곳이길 호기심과 간절함이 뒤엉킨 채로 땀을 흘리다 보면 한 순간 그 아름다움이 쿵하고 가슴을 내리 찧어 그 가치가 온전히 가슴에 담긴다. 아마 불행 끝에 예상치 못한 순간 성큼 온 행운과 행복이 이런 걸까.



   그나저나 내 생에는 완전한 순간이란 없는 걸까. 심쿵한 그곳이 정확히 찾아간 곳이었으면 좋으련만 숨을 훅훅 몰아쉬며 바삐 뛰던 심장을 쿵 멎게 만든 그곳은, 실수였다. 추측하건대 등산 끝에 그곳을 만난 동공은 별이 박힌 듯 반짝였을 테지만, 광경을 뒤로한 채  발길을 돌리며 그 근처에 있다던 유명 카페를 찾아가려고 지도를 켜자 깨달았다. 아 난 또 틀렸구나. 뷰가 좋은 곳이라 알려진 곳은 여행 기간 동안 다 가볼 수 없을 만큼 여러 곳이 있었기에 가볼 만한 카페가 가까이 있는 어느 한 뷰를 택했었다. 그리곤 열심히 오르막길을 올랐는데, 이번에도 숙소 사건 마냥 다른 곳을 설정한 채 지도를 따라간 게 아닌가. 정신을 안 차린게 아니라 난 그저 그렇게 허술한 사람이다. 하지만 어느 닫힌 카페를 만났을 때처럼 허탈하지는 않았다. 스스로에게 실망감이나 화가 치밀지도 않았다. 여행 내내 자꾸만 극명해지는 나라는 캐릭터와 싸웠던 나에게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맞는 거보다 틀리는 게 더 많은 내 인생인데, 위치 잘못 찍어 도착한 곳이 이 정도면 인생 맨날 틀리면서 살아도 되는 거 아님?'


   이건 위로가 아니라 자신감과 용기였다.



   틀린 길로 잘못 들어섰다가 불꽃놀이를 봤는데 그게 되게 근사했거든요.     -드라마 <스타트 업> 중 도산.



   어떻게 흘러가도 좋다. 길을 어떻게 잘못 들어도 혹은 잘못 든 것만 같아도 괜찮다. 그곳엔 이런 게 있기도 하다.  눈동자를 밤하늘 반짝이는 별이 되도록 만들어줄 그 어떤 것 말이다. 이는 확신 없는 오르막길을 오를 때도 세상이 나의 편이 아닐 때도 마음을 붙잡고 외워야 할 주문이다. 이 생에서 잊지도 틀리지도 말아야 할 유일한 주문서 일지도 모른다.   



사진출처: 드라마 스타트업 공식 홈페이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