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색 풍선

by 정돈서재

우리 집이 IMF를 겪었든, 신축아파트 아이들로 인해 내가 열등감을 느낀 것과 상관없이... 나는 그들과 같은 교복을 입고 중학생이 됐다. 내가 여자 아이들과 거리를 두고 지냈든, 내가 키만 크고 달리기는 좀 느리든... 내가 중학생이 되면서 이렇게 거리감을 두던 친구들과는 같은 초등학교 출신이 돼버렸다.


중학교라는 새로운 환경에서는 서로 구분하기 어려운지 출신 학교로 서로를 구분했다. 그럴 만도 했다. 초등학교 때는 나를 키 크고 덩치 큰 애로 구분했다면, 중학교에서는 내가 못 보던 큰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얼떨결에 나는 신축 아파트 친구들과 함께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이 돼버렸다. 중학교에서 놀란 건 서열정리가 다방면으로 신속히 이뤄진다는 것이다. 키뿐일까... 이성으로부터의 인기, 공부 잘하는 사람, 심지어 좋아하는 아이돌까지도 순위가 생겨났다. 서로 좋아하는 것을 우기는 이런 혼란을 틈타 나는 내 이미지를 다시 만들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속으로 외쳤다. “그래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 이야!” 아마도 이 작업 중 일부는 IMF로 인한 잔상들을 포장하는 것으로 시작됐던 것 같다. 우선은 내게 들어올 질문에 대해 미리 준비했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혹시나 부모님 직업을 물어볼까 봐 조금의 거짓말도 준비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잘하지 못했던 축구에서 벗어나 농구라는 새로운 운동으로 나를 대표했다. 소위 말하는 축구파와 농구파 중에 농구파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물론 다수가 즐기는 축구를 꾸준히 했지만... 나도 내가 더 좋아하고, 잘하는 운동을 찾게 됐다. 물론 새롭게 시작했다고 해서 돈을 팍팍 썼던 것은 아니다. 이점은 나의 불만사항 중 하나였지만, 돌이켜보면 내게 절약이라는 습관이 생기던 시기이기도 했던 것 같다.


이제부터 얘기하는 것을 특정 지역을 대표한다고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녀공학’ 중학교의 특징이기도 하고, 단지 그 시대 내가 경험했던 것을 말해보고자 한다. 중학교에 들어와서 서열화는 더 강해졌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목적은 '이성'의 관심을 최대한 끄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대단해서 그런 들끓는 호르몬 파티를 피해 간 것은 아니다. 나도 혈기가 왕성했으나, 친구들처럼 적극적으로 나서는 법을 몰랐던 것 같다.


우선 친구들은 바지와 치마를 줄이기 시작했다. 나도 7인치니 8인치니 바지를 줄이려 했는데,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몰라서 수선집 어머니께 상담을 받았던 것 같다. 지금이야 많은 것이 자유롭겠지만, 그 당시엔 ‘두발 자유화’를 부를 짖을 만큼 억압을 해서인지 머리에도 신경들을 많이 썼다.

한 친구는 호들갑을 떨며 내게 말했다. ”나 염색했다?! “ 자세히 형광등에 비춰보니 어두운 파란색이 보이긴 했지만, 그건 정말 잡아내려고 봐야 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무슨 색으로 어느 방식으로 염색하면 안 걸리는지도 자세히 설명해 줬다. 속으로는 보이지도 않을 색으로 염색할 거면 왜 염색을 하는지 이해하진 못했다. 아마 나도 넘치는 머리숱을 갖고 있었다면 온갖 걸 다 해봤겠지만, 그때부터 탈모 걱정을 하고 있었기에 머리카락에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이걸… 부모님께 감사해야 하는진 모르겠지만, 선생님께 끌려갈 일은 한 가지 덜었다고 할 수 있다. 친구들이 모여들도록 만든 이야기는 담배를 피우는 과정과 느낌, 중2, 중3 형 누나로부터 배운 선진 문물들, 그리고 비보잉을 잘하는 법, 노래에서 고음을 내는 법 등등이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가 있을 때 멀찌감치 자리에 앉아있었기에 이런 것들이 정말 이성의 관심을 끌었는지는 의문이 든다. 단지 같은 관심사를 가진 친구들끼리 어울려 다녔고, 담배에 관심이 있던 친구는 담배에 관심이 있던 이성을, 춤추는 게 멋있다고 느꼈던 친구는 그런 친구와 함께 만났던 것 같다. 찐따 같던 나는 멀리서나마 누가 누구랑 사귄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누구나 적극적으로 이성친구를 만들어갔던 건 아니다. 우리에겐 아이돌이라는 가상 연애 상대가 있었으니… 여자 아이들은 다들 한 명씩 벌써 시집을 가서 어린 나이에 누군가의 부인으로 불리길 원했다. 매일 아침이면, 계상 부인, 호영 부인, 에릭 부인들이 자기 신랑의 포토카드를 꺼내 자랑하고, 사실은 지오디 윤계상이 누구랑 사귄다느니 어디서 들었는지 모를 소문을 거의 매일 쏟아냈다. 반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이 다르다면 서로 편을 갈라 다투고, 점심시간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같이 밥을 먹는 진풍경도 종종 봤다. 아이들이 동급생들과 중학교 선배들의 영향을 받는 동안, 나는 고등학생이던 형의 영향으로 영화와 팝음악 등을 친구들에게 전했던 것 같다. 전했다는 건 고상한 표현이고, ‘나는 너희들보다 수준이 높아’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 관심사에 대해 내가 모르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을 반기기보다는 질투했던 걸 보면 자기 과시용 지식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글을 쓰다 보니, 내가 크게 놓친 게 있다. 독자들은 교육열이 강한 사람들이 아닌가!


공부에 대한 얘기를 빼먹을 뻔했다. 내가 강남에 오기 전 송파에서의 공부는 뭔가 얄미로웠다. 그리고 굉장히 경쟁적이라고 느꼈다. 아무래도 강남 3구에 속하니 이곳 아이들과 부모님의 공부에 대한 열정도 남달랐으리라. 특히 나는 절대 여학생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여학생들은 산만하지 않고, 착실했으나 그들이 어떻게 공부하는지 물어봐도, 모르는 걸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았다.(그들은 공부한 내용을 알려주거나, 자신의 자료를 공유하는데 예민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게 요청했다.) 공부를 잘하는 게 인기를 얻는 법이었는지 나름 노는 친구들도 종종 공부를 잘하긴 했는데, ‘적게 공부한 모습을 보이고, 성적이 잘 나오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이상한 문화가 퍼져나가고 있던 것 같다. 노력의 결실보다는 타고난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다른 이들과 구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마도 이런 분위기 속에도 공부를 잘했던 친구들은 가정에서 좋은 교육을 따로 받았을 것이라 ‘추측’만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이 내게 전수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나랑 지내던 친구들은 비싼 HI-TEC-C(하이테크씨) 펜 몇 자루를 모았는지, 0.4mm로 공부하는 게 좋은지, 0.3mm로 공부하는 게 좋지 연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식이 아니라, 누가 누구보다 공부를 잘하고 걔는 몇 시간만 공부했는데 잘하고, 누구는 특별 과외를 받고 있다는 둥 이상한 소식에만 빠삭했다.



지금 봐도 안 좋게 생각하던 문화는 ‘일부 공부 잘하는 친구’ 혹은 ‘공부를 열심히 하려는 친구’를 평가 절하하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공부를 극도로 잘하는 친구는 누구에게나 인정을 받으니, 예외일 수 있겠지만..) 그들 사이에는 개인적인 감정이 많이 섞여 있을 것이다. 나도 수행평가니 뭐니 하며 그들의 이기심에 치인적이 있긴 하지만 그 정도로 미워할 일인가? 싶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미워하면 뭐 하나 그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실력을 쌓아나갔을 것이다. (차라리 그럴 시간에 서로 협업해서 공부했다면, 좋은 친구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또, 이름을 밝힐 순 없지만 A라는 친구는 정말 우리가 보는 앞에서 쉬는 시간에도 공부를 했으나 중간고사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학교 이외의 활동은 모르겠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한 친구를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친구의 노력을 비하하는 모습에 나는 동조할 순 없었다.



나는 공부로 인한 질투도, 부러움도, 무시도 받지 않았다. 어정쩡하게 못하는 나의 점수를 보고 친구들은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어머니는 내 중학교 1학년 성적을 받고 충격에 휩 쌓였다. 학교일을 마치고 오셔서는 나와 함께 학원 상담을 받으러 돌아다녔으니, 형에게만 집중됐던 관심이 원치 않게 내게 온 것이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그 당시엔 주의력이 산만해서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없었다. 공부를 극도로 잘하셨던 부모님은 ‘공부를 못한다는 행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셨다. 다행히도 아빠는 ‘때가 되면 공부를 하게 돼있다’, ‘압박을 한다고 스스로 의지가 생기진 않는다’라는 생각을 갖고 계셨다. 반면, 엄마는 나를 패서라도 공부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지만 다행히도 아빠의 힘이 더 강력했다.



내가 접하는 중학교의 환경도 영향을 미쳤지만 신뢰를 바탕으로 한 가정환경이 이후에 내가 (내 기준의) 좋은 대학을 가고 긍정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바탕이 됐다고 생각한다.(부모님은 나를 감시, 감독하는 일이 없었다. 용돈의 사용에 대해서도,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오는 것도, 그밖에 내가 하는 활동에 대해서 완전히 믿어주시는 걸 오랜 기간 느끼며 살았다.) 공부를 해야 한다기보다는 공부라는 것은 필요하고 평생에 걸친 과업이라는 인식은 우리 집뿐만 아니라 친척들에게도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배경에서 중학교 친구들을 바라봤을 때 ‘왜 저럴까?’ 하고 의문이 가는 행동들이 많았다.



내가 너무 시니컬하게 얘기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내가 송파에서 만난 잊지 못할 좋은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후 강남으로 넘어가고 싶다. 그 친구들과의 따듯하지만 짧은 추억이 지금도 기억에 남고, 이후 강남의 남중으로 전학을 간 뒤 인연을 이어오지 못해 아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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