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udy matters

분위기라는 것(2)

by 정돈서재

모두는 아니지만, 이렇게 바르고 정돈된 무리의 아이들을 만나게 된 일은 내게 신선한 충격이였다. 차로 고작 20분도 안걸리는 짧은 거리를 이사왔을 뿐인데 왜 이곳은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을까? 나의 세계관을 구성했던 송파에서 가치관들이 왜 이곳에선 다르게 발현되는 것일까?



중동중학교에서 2학년-2학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커다란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전엔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농구를 하거나, PC방을 가고 뭐든지 놀거리를 찾는 것이 내가 해왔 일상이였다. 하지만 새로 살게된 동네엔 생각보다 놀 곳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사온 아파트는 자연과 건전함, 그리고 단조로움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공부를 잘하던 한 친구는 수업이 끝나면 엄마 차를 타고 학원으로 향했다. 그게 지금으로부터 25년전인 2000년도의 일이다. 민규라는 친구네 집에가니, 집 어디에도 TV를 찾을 수가 없었다. 때론 대화가 소음으로 느껴질 만큼 조용한 분위기였다. 물론 그런 억압 때문인지 기회만 주어지면, 민규는 게임을 미친듯이 했다. 내가 그런 가혹한 환경에 대해 너무 하다고 말하면, 민규는 그런 집의 분위기를 받아들인 것 처럼 보였다. 부모님에게 불만을 품기도 했지만, 동시에 부모님의 가이드에 합당한 이유가 있음을 내게 설명했다. 그리고 성적이 꽤 괜찮았던 걸로 기억한다.



시커먼 남중 친구들이 로맨스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수도승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엇인가 비행을 저지르는 것보다 상위의 가치가 있기에 그것을 따르는 것인지 궁금했다. 처음엔 그것이 ‘공부’라는 공통의 목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게 한 건, 중학교 2학년 같은 반에 있던 지훈이, 승명이, 그밖에 공부를 잘하던 친구들 때문이였다. 어디에나 공부를 잘하는 친구는 있었지만, 그 사실보다는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을 대하는 주변 친구들의 자세가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이전 학교는 남녀공학이여서 그럴 수 있지만… 공부나 운동을 잘하는 것도 인기 있는 아이가 잘해야 하는 것 같아 보였다. 외모나 인기를 인정하기 힘든 친구가 뭔가를 잘하고 열심히 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납득할 수 없는 친구가 공부를 잘하고, 운동을 잘하면 항상 뒷말이 돌았다. ‘그거라도 잘해야지.’, ‘걔는 자기 실력이 아니고 OO 때문이래.’ 와 같은 말이 열심히 한 친구들이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칭찬이였다. 그리고 난 그렇게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동조하기도 힘들었다. 반면, 중동중에서는 잘하는 친구가 있다면 아이들은 주변에 몰려들어 이것저것 물어보기 일 수 였다. 물론 모든 친구가 아주 온화하고 친절하게 내가 모르는 문제를 알려주는 건 아녔다. 심지어 나는 왜 책을 들고 보는지, 왜 거기에 밑줄을 긋는지와 같은 것도 질문을 했으니 그 친구들이 이상하게 봤을 것이다.(한창 공부는 안하고 방법론만 궁금해 하던 시기였으니…) 지훈이는 이제 막 전학온 내게도 “넌 그것도 모르냐?”, “내가 어디까지 알려줘야 하냐”고 장난스럽게 말하면서도 내가 모르는걸 자세히 알려주고, 추가 문제까지 내주었다. 반 한 켠에서는 다양한 책에 대해 토론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때 아이들이 토론하던 ‘국화와 칼’이라는 책을 나는 대학교에 와서야 보게 됐는데, 이런 책들을 중학교 때부터 함께 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나중에 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담임 선생님의 지시로 반장과 부반장이 특정 과목을 우리에게 알려주게 했다. 그때 부반장이던 ‘종수’는 A4용지에 자신이 타이핑해서 만든 요약 자료와 빈칸 문제들을 우리에게 나눠주고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어떻게 자료를 정리하고 공부하는지 나는 그때 처음 알게 됐던 것 같다. 그밖에도 운동과 공부를 모두 최상위로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반장 ‘지훈’이도 반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기억이 있다. 다른 특징은 '누가 공부를 잘하는가?' 에 있어서 아이들의 서열이 굉장히 명확했다는 것이다. 시험을 통한 객관적인 수치를 받아들이는 모습. 그들의 성적 뒤에는 다른 뒷말이 붙이지 않았다. 이런 성적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과 인정이 각자의 공부를 변화시키고, 다시 도약할 수 있는 시작점이라는 사실을 나는 한참 뒤에 알았다. 결국 이렇게 협동하고 인정하는 분위기에서…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존중받고, 서로 노력하는 분위기는 내가 이곳에서 받은 큰 충격중 하나였다. 멋을 부리고, 이성에게 인기있는 것도 중요했지만, 이 집단에는 공부를 잘하는 것이 인생을 걸만한 중요한 기준이라는 것은 틀림 없었다.



지금도 만나는 나의 중학교 친구들이 모두 공부를 잘한 것은 아니였다. 중학교 3학년, 그 고민 많을 시기 우리는 코엑스 메가박스 심야영화를 즐겨 봤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아무도 없는 길을 걸어서 집으로 오곤 했다. 차가 한대도 없는 도로 위를 걷다보면, 그 조용한 거리를 우리가 지배한 것 같았다. 허세섞인 꿈도 있었지만,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나눌 깊이있는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나는 비록 우리 아버지의 조기 실직을 솔직하게 말하진 못했지만… 가정에서 배운 많은 것들을 이 친구들과 공유했던 것 같다. 돈을 올바르게 쓰는 것이란 무엇인지, 약속을 지키는 것, 오랜 우정을 쌓는 것, 부모님이 보여주신 성실함과 같은 가치들에 대한 생각을 그 시기에 나눴다. 나는 20년이 넘도록 생각을 나누고, 우정을 유지할 친구들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걸쳐 많이 얻게됐다. 대학을 와서 느낀 것이지만 대학생 때에도 모나지 않은 중-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는 것은 공부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서로 가진 것이 다르고 가정환경은 확실히 다르지만, 우린 서로의 가정에서 받은 정신적 유산을 은연중에 공유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별로 모나지 않은 다수의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것! 이런 교우관계가 내가 이곳을 좋게 생각하는 이유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런 공부 일변도의 분위기의 위험성도 존재 한다. 강남, 특히 핵심적인 8학군 지역에서 좋지 못한 대학에 가게 되면 그 아이는 소외되는 경향이 있다. 내가 감히 그 친구들의 마음에 공감한다고 할 순 없지만 수능이 끝나고 그 결과로 인해 동창 모임에서 잠적하는 친구들... 괜찮은 학교를 갔지만, 그 후로도 끝없이 이어지는 부모의 요구를 들어야 하는 친구들을 봐왔다. 많은 강남 아이들의 집안에서는 그렇게 압박하는 부모를 이기기 쉽지 않다. 그들의 부모는 학벌면에서나 직업 면에서 사회적 지위를 갖춘 경우가 많다. “엄마도 공부를 안했으면서!” 라고 말하기엔 엄마나 아빠가 공부를 너무 잘했다. 그런 환경에서 ‘나’만 공부를 잘 못한다는 건, 이겨내기 힘든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 있다. 나의 학창 시절에도 ‘고도의 지식 노동’에 종사하는 부모님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같은 반에 부모님들이 의사 동료인 경우도 종종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정도가 더 심해진 것 같다. 주말 오전 근처 카페를 가면 엄마, 아빠가 자녀를 데리고 공부하는 모습을 정말 많이 볼 수 있다. 그들을 관찰하면… 부럽게도 아주 충분한 음료와 디저트를 사놓은 모습이 보이지만, 부러운 것은 이것이 전부다. 열정적인 아버지의 표정, 많이 혼났는지 시무룩한 오빠, 혼나는 것을 애교로 넘어가려는 여동생이 보인다. 놀라운 점은 부모님들이 수학 미적분을 펴놓고 어찌 그렇게 현역처럼 설명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영어를 알려주던 어머니의 실력은 자녀보다 현 입시에 더 적합해 보인다. 자녀들은 꼼짝없이 그렇게 부모님의 강의(?)를 죄인의 표정으로 듣고 있다. 주말 카페안의 그 수많은 부모들의 능력이 대단한 것은 알겠으나, 부모의 눈을 피하고 싶어하는 그 아이들이 집에서는 웃으면서 식사를 하고 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고등학교 편에서 한 번 더 얘기하겠지만, 공부를 최우선으로 하는 사고 방식은 아이들의 시야를 좁혀서 경주마 처럼 만든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지식 노동’만이 가치있다고 여기는 착각에 빠지게 할 수 있다. 대학교 졸업 이후, 사회생활을 하면서야 비로소 나는 공부만이 답이 아니고, 공부 외에 다른 선택지가 꽤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세상에 직업이 얼마나 다양한가?!) 또한,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중에는 우리가 강요받은 그런 전문직종 이외에도 창의적이고, 독점적인 일로 성공한 사람도 있음을 배웠다. 특히, 강남의 평균 자산이 높을 뿐, 강남에 살지 않더라도 전국에 부유한 사람이 많다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됐다.



나는 이곳을 사랑하지만, 이곳으로의 진입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점들에 대해 한번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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