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인맥

by 정돈서재


1. 넌 어디서 왔니?


“창민아, 저 친구도 중동고 나왔다는데? OO동에 산데.”


2013년 1월 나는 한껏 긴장한 모습으로 여의도 사무실에 첫 출근을 했다. 고층이라서 볼 수 있는 드넓은 한강과 여의도 공원. 사무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통창으로 보여지는 한강은 꽁꽁 얼어있었다. 창문 사이로 나무가 보였는지는 확인할 수도 없는 긴장감을 안고 스물여덟에 첫 출근을 했다. 사무실의 대빵, 사업부장님과의 면담을 위해 나를 비롯한 세명의 동기가 통로를 걸었다. 들어갈 땐, 일직선의 통로만 좁게 보였는데, 면담이 끝나고 나와보니 그 복도 옆으로 줄줄이 모니터가 빼꼼,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내가 속하게 될 팀에 인사를 하기 위해 걸어가는 동안, 길고 짧은 머리의 뒤통수들과 희고 검은 옆모습들만 보였을 뿐 얼굴을 다 기억할 수도 없었다. 사무실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키보드 타이핑 소리만 울려 퍼질 때, 내가 도착하니 그 키보드 소리가 멈췄다.


(출처 : LG디스플레이)

기획팀장님께서 팀에 나를 소개했고, 이미 내 이력을 알고 있던 팀장님이 편하게(?) 대화를 해주셨다.

“이제부터 OO팀에서 일할 ‘신 OO’이라는 친구이고, 키도 크고 아주 잘생겼어.” 하며 아직 미혼인 여직원들에게 눈짓을 줬다.(그 시절이니 가능했던 것 같다.)


“안녕하십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풀정장에 넥타이까지 한 나는 신입사원의 풋풋함을 보여주려 했으나, 나의 과장급 성숙한(?) 외모 때문인지 모두 조용했다. 아마도 오지랖 넓은 어르신들께서 말을 걸고 싶었겠지만, 팀장님과 먼저 대화를 이어나갔다.


“OO 씨” 아마도 이날이 팀장님께서 존댓말을 써준 유일한 날이었던 것 같다.

내가 공부했던 전공, 잘하는 것, 취미, 술은 좋아하는지, 여자친구는 있는지 등등 일보다는 사람을 알아가는 대화를 이어갔다. 그것이 그분의 대화방식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는 “우리 사촌형이 중동고 출신인데, 아주 빡쌘 고등학교 나왔네.”라고 말을 전해주셨다. 팀에는 동갑내기 창민, 한 살 어리지만 대리가 될 예정이던 수지를 소개해줬다. 창민은 중산고 출신, 수지 대리는 숙명여고 출신이니 같은 동네 사람끼리 서로 편하게 지내라는 말을 전해주셨다.


그 밖에도 회사 셔틀버스를 타보니 도곡동에서 셔틀을 타는 태준이 형과 서현이도 강남 토박이들이었다.


나와 친하게 지냈던 기범이 형은 같은 같은 동네 출신이고, 아직 본가가 거기 있다며 나를 편하게 해 주셨다. 종종 본가에 오실 때 나에게 연락을 했는데, 양복이 아닌 아주 후리 한 모습의 기범이 형을 볼 수 있었다.

나와 중학교가 동일하다며, 동네 얘기를 해주시던 범준님은 나와 일로 마주할 일이 없었지만 퇴사할 때까지 따듯한 인사를 건네주셨다.

같은 해에 입사한 동기 30명 중에는 나와 같은 중학교 출신 둘을 만나고, 같은 지역 고등학교 출신을 꽤 많이 만났다.


이 밖에도 지역으로 엮인 인연은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급속도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동문회 선배는 그룹사의 다른 사업부 고등학교 선배를 만나게 해주기도 했고, 같은 동네 사람들은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회사에서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내가 대단한 이득을 추구하진 않았지만, 위와 같은 점에 있어서는 ‘출신 지역’, ‘출신 고등학교’ 덕을 많이 본 것 같다. 내가 대기업에 입사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강남’ 출신 비율이 다른 지역보다 높다는 생각을 했다. 지방으로 치면 같은 ‘도’, ‘시’, 서울로 치면 ‘구’의 개념으로 구분했을 때에도 그 인구가 많았다. 내가 추측하건대 이런 현상은 고소득 직종으로 갈수록 더 커질 것으로 생각한다. 의사 집단은 그 대표적인 예시일 것이다. 강남의 고등학교들이 얼마나 많이 의대를 보내는가! 또, 전문가 집단, 대기업, 금융권 등 강남에서 선호하는 화이트 칼라 직종에서 8 학군 출신을 동료로 맞이할 확률이 클 것 같다. 따라서 강남에서 자랐다면 되도록 고소득 직종에 속하길 바란다. 보이지 않는 끈끈한 관계에 속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 관계를 이용해서 직접적인 이득을 본 것은 아직까진 없다. 승진이라든지, 이직 혹은 금전적 이득과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이 아쉬운가? 아쉽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기도 하다. 인맥을 잘 챙겨 먹는 친구들은 30대 초중반부터 인맥을 통해 서로 밀고 끌며 다양한 이득을 봤다. 그들과 내가 다른 건, 내가 그들과 같은 수단이 없고 계속해서 선배, 형, 누나들에게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해야 할 것 같은 걱정 때문이었다. 다만, 나도 인맥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만 갖고 있는 건 아니다.


만약 강남 출신으로 인맥의 혜택을 누리고 싶다면,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면 어떨까 생각한다.


- 인맥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 조직에서는 일을 할 때, Fit 이 맞는 게 정말 중요한데 그것을 지인을 통해 추천받을 수 있고, 그 방식이 매우 효과적이라고 여겨보자.


- 실력이 중심이 돼야 하지만, 그 실력을 알아봐 주고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건 인맥을 통해서 퍼져나갈 때가 많다. Linkedin, 리멤버와 같은 플랫폼을 이용하듯 인맥을 활용할 뿐이다.


- 다만, 정당한 경쟁이 아니라 조건이 안되는데 인맥을 통해 어떤 자리에 앉는다면, 나중에 배탈이 날 수 있다. 욕심도 크면 문제가 생기는 법!


추가로 아무리 강남 출신으로 동질감을 얻더라도 인맥에 있어서 유념했으면 하는 점이 있다.


- 내 출신보다는 내가 뭔가를 줄 수 있는 존재가 돼야 한다. 내가 나온 학교, 자격증이 필요하겠지만, 그보다는 상대방에게 도움이 될 존재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길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불공정 거래가 돼버린다. 필요 없는 서비스를 관계로만 밀어 넣는 것이다. 그것은 한 번은 통할 수 있으나, 그렇게는 오래가지 못한다.


- 나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함축적인데, 관계의 측면에서 계속 이어나가고 싶고, 만나고 싶고, 특히 “함께 일하고 싶은.” 즉, 필요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이 험난한 인생,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가!


살다 보면 조직에서 관계만을 통해 더럽게 일이 처리되고, 누가 봐도 (명백히) 부당한 일이 인맥을 지키기 위해 벌어진다.(특정 지역, 특정 학교, 가족관계 등등) 그리고 그렇게 되면 조직이 병든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강남 사람은… 그렇게 해서까지 얻어내야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내가 감히 선배들에게 이런 말씀을 전할 순 없지만, 후배님들께서는 실력을 겸비한 네트워킹을 해주면 좋겠다.


2. 그래도 어색한 것


어린 시절부터 같은 조직에서 오랜 기간 관계를 쌓아 왔다면 좋겠지만, 인연이란 게 그렇지만은 않다.


한 번은 회사 이직 후, 거래처 인사를 다니던 때였다. 나이 든 사람들이야, 요즘 상대 회사 상황이 어떤지, 경제가 어떻고, 여름휴가나 연휴 계획이 어떤지 등등 표면적인 대화를 하게 마련이다. 혹여나 골프 얘기까지 나오면 상대방이 골프를 원하는지 눈치를 보며 비즈니스를 이어나간다.


사는 지역을 먼저 얘기하진 않냐고?


상대방이 묻기 전에 내가 어디 사는지는 잘 말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좋은 이야깃거리가 될지라도 말해서 좋을 게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조심하는 과정 중에 우리 팀에서 내 거주지를 말하거나, 상대방 측에서 식사에 참석한 OO책임님이 강남에 사셔서…라고 운을 띄면 자연스레 그쪽으로 대화가 흘러간다.


“책임님이 원래 대치동 출신이시고 중대부고를 나왔으며, 지금도 자녀들과 함께 대치동에 사신다느니 등등등…”, “간혹 다른 미팅에서는 자신은 1980년대 청담동에서만 자랐다며” 청담동의 여유로움을 먼저 소개해주시는 분도 뵐 수 있었다. 이럴 때마다 조심스러운 건, 같은 강남이어도 그 범위가 굉장히 넓다는 것. 압구정에 있는 아파트에서 자란 사람을 보면 나 역시도 그분이 ‘부자’ 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테남과 테북은 다른 경험을 했을 것이다. 비슷한 나이에서 그나마 공통점을 찾아보면, 대부분 "대치동 학원가"에서 공부했다는 접점으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하지만 나이 차이라도 많이 나는 분을 만나면, 우리가 살아온 강남은 또 다른 것이 된다. 그냥 무작정 근접한 동네라고 동질감을 느끼긴 어려운 것이다.


또 다른 예시로는 나이와 출신 고등학교도 비슷해서 공통점으로 대화를 이어 나갔지만, 누군가는 같은 대치동이어도 좋은 아파트에 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발짝 발을 빼기도 한다. 또는 잠시 전세로 살았고 현재는 대치동에서 머나먼 곳에 산다는 이유로 굳이 자신의 출신지를 밝히기 꺼려하기도 한다.


이점은 OO향우회와 같은 지역의 끈끈함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 아닌가 싶다. 겉으로 보면 그들은 그냥 같은 ‘도’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아껴주지 않는가? 반면, 쌩으로 사회에서 만난 강남 사람들은 친해지기 전에 서로 알아야 할 게 많은 것 같다.



3. 외부에서 바라본 시선


흠.. 사회생활을 하며 비강남권에서 바라본 강남 사람은 어떠한가?


이것은 나의 대답보다는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 개개인의 생각이 곧 답이라 할 수 있다. 누군가는 맹목적으로 그들은 돈이 많겠지… 하며 사소한 지출과 행동에서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반면 모든 걸 서열화시키는 사람들은 개포보다는 대치, 대치보다는 역시 압구정이라며 그 친구는 찐부자가 아니라는 식으로 얘기할 수도 있겠다.


일을 못하면, 믿는 구석이 있어서라고 뒤에서 말하고, 일을 잘하면, 역시 여유 있는 집 자식이 돈 생각 안 해서 일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 같은 짠돌이가 돈을 모으는 모습을 보면, 역시 저래서 부자가 된다고들 한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겨우 차를 사거나, 해외여행을 가면 역시 크게 크게 쓸 줄 안다고 말해준다.(나도 똑같은 월급을 받는 사람 아닌가…)


내가 들었던 소린 아니지만, 혹시 모른다. 저 자식 돈 있는데, 왜 이리 돈 안 쓰냐는 소리를 뒤에서 했을 수도 있겠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강남의 이미지로 인해 내가 받는 수혜도 있다. “나를 그다지 업신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뭔지 모르지만, 돈이건 사회적 지위건, 인맥이건 내 뒤에 뭔가가 있을 거라고 오해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오해들로 사람들은 내게 강남 얘기를 물어보고, 결국 이 글을 쓰게 된 것 아닌가?


4. 그래서 자녀도 강남에서 키울 텐가?


강남에서 자녀를 키우는 게 좋을까? 나는 Yes라고 조심히 대답하겠다.

다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에게 있고, 그 결과도 정해진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곳에 온다고 모든 게 보장되는 건 없다. 그리고 그동안 연재한 글 전체를 읽어보면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략하게 내가 생각하는 장단점을 적어본다.


장점

- 경쟁을 하고 싶다면 정말 오지게 할 수 있다. 경쟁이 필요하다면, 웰컴!

- 오래된 학교들의 전통과 역사를 받을 수 있다. 끈끈한 선후배들을 만날 수 있다.

- 동네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배경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

- 열심히 하는 친구들(공부, 운동, 취미)과 좋은 추억을 쌓을 확률이 높다.(사회가 문제라는 둥, 그래서 안된다는 둥 이유만 늘어놓는 회피형 비관론자의 비중이 작다.)

- 말로 할 수 없는 이곳만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자신감 있는데 조심하는 분위기, 여유, 무난함 등)

- 학급의 성공한 부모님들의 영향을 공유할 수 있다.


단점

- 자신의 실력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고통받을 것. 이것은 어디나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함

- 공부로 고통받을 수 있음

- 집값이 비쌈. 과거보다 경제적 부담이 크다.

- 학부모들의 강력한 네트워킹. 나는 좋게 생각하진 않는다.

- 사업가들도 있지만, 많은 수의 지식 노동자들을 접한다. 영업하면서 느꼈지만, 세상엔 지식에 기반하지 않은 일들도 많다. 자칫 그것만이 답이라 생각할 수 있다. 연예 계통에서 일하는 분, 제조 공장을 하시는 분, 기계 수리를 하시는 분, 장사를 하시는 분, 공무원 등등… 을 보며 자라기 힘들다.


<마지막 말>


2부에서 나는 강남으로 이사오기 전과 이사 오고 난 후를 비교해서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1부에 비해 2부는 이야기 형식보다는 분석에 가까운 글들이 늘어난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글을 다 읽고 독자들이 뚜렷한 답을 얻으셨을지 모르겠다. 어차피 내가 뭐라 한들 강남으로 올 사람은 오고, 안 올 사람은 집값도 모른다. 어떤 독자는 글을 다 읽고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글의 의도는 독자들이 사회에서 만들어낸 강남에 대한 이미지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따라서 “그래서 어쩌라고?”와 같은 생각을 느끼실 수도 있겠다. 나의 단편적인 경험을 모든 것으로 인식하지 마시고, 이런 단면이 있다는 점만이라도 얻어가셨으면 좋겠다.


내 개인적인 경험이 들어가다 보니 어떤 내용은 감추고 싶고, 왜곡하고 싶던 건 사실이다. 그로 인한 글의 수정이 글 전체에 아쉬움을 남겼다면 알려주시면 좋겠다.


중학교 대비 고등학교 생활에서 느끼는 비교와 경쟁이 압도적으로 커졌다.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배경의 아이들이 섞이는 시기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동네에서는 보여주지 않아도 될 “자기 인증”을 옷이든, 운동이든 보여줘야 했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그 나이에만 나오는 격정적인 호르몬과 한국인 종특 비교의식이 만나서 극대화되는 시기가 중고등학생 시기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는 비강남 친구들이 이런 면에선 노하우도 있고 더 열정적으로 자기 어필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자기 과시와 타인에 대한 무시를 보였다.)


많은 오해중 하나가 강남에 산다고 강남 사람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긴 하나, 대부분은 수능이 끝나고 이곳을 떠나간다. 대치동을 중심으로 한 학군지는 수많은 학생들이 들어왔다가 대학에 합격하고 나가는 그런 특수한 모습을 하고 있다. 내 친구들도 수 없이 강남을 떠나갔고, 지금도 우리 아파트에는 연신 이삿짐 차가 들락 거린다.


강남에 산다고 만사형통은 아니다. 평생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수많은 부잣집 도련님들이 학업과 진로, 부모와의 안 좋은 관계고통받는걸 나는 많이 봐왔다. 강남보다 더한 곳에 살아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다 각자의 고민이 있다. 다만, 누구든 각자의 자리에서 막혀있는 장애물을 이겨내고 세상에 한 발짝이 나오면 좋겠다. 그리고 자신이 이겨낸 것처럼, 다른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며 살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글의 시작부터 끝까지 응원해 준 Jinny에게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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