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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이 뜨기 전에 Mar 23. 2022

당신의 기억을 살 수 있나요?

5.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교수님 제가 이번 작업에서 하고 싶은 것은 여성의 삶 또는 위치에 대한 것입니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의 형상을 토대로 하고 싶어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왜 그렇지요?    


아시다시피 이 비너스는 얼굴은 가려진 채, 여성의 특징만이 강조되어 있잖아요.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이 아닌, 출산의 도구이거나 성욕의 대상이 되어버린 그런 여성의 위치에 대해 고민해보고 싶은데, 이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토대다 되어줄 것 같아요. 앞으로 더 다듬어봐야겠지만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 대해 더 조사해보면 방향이 더 구체적이거나 바뀔 수도 있을 거예요.    


네?    


그 당시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더 폭넓게 조사해보고, 왜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도 학생 나름대로의 생각을 더해서 정리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럼 다음에는 작업이 어떻게 나아갈지 방향이 더 구체적이 될 거예요.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작업이잖아요. 그냥 학설이 아닌, 자기 생각이요. 물론 객관적인 자료를 활용한다면, 객관적인 근거자료를 먼저 더 긴밀히 따져봐야 하고요!    


민서는 이수진의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작업 내용에 집중해서 그런지 쿵쾅대던 가슴도 진정이 되었다. 어떤 작업이 될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네. 알겠습니다.    


다음에는 첫 번째로 발표를 해봐요. 오늘 다들 자기 발표를 했는데, 본인만 하지 못했네요.    


아.. 네.. 제가 홈페이지 접속하거나 광 클릭하고 이런 걸 잘 못해서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나이가 들어서?    


민서와 이수진은 자연스레 같이 강의실을 나왔다.    


대학교 시절 어쩌면 한 번쯤은 꿈꾸어 봤을 이 장면. 민서는 이 과거와 같은 공간에 다른 시간 속의 두 사람의 모습이 겹겹이 쌓이는 것 같았다.      


건물 밖으로 걸어가는 내내 민서는 많은 것을 묻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하지 못했다.    


         내가 아는 이수진이 정말 맞는 건가? 왜 사라져 버린 건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민서는 고개를 흔든다. 그 기억 때문에 힘들었던 시기를 생각하면, 여기 있고 싶지도 않다. 한마디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아... 교수님 제가 늦깎이 대학생이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다음 수업이 있어서 그만 가보겠습니다.     


이수진의 눈을 본 순간, 그냥 아무 느낌이 사라진다. 우습게도 그렇게 아파오던 머리도 너무나 멀쩡하다. 때로 스스로의 답답함에 분노하던 것도 사라졌다.     


이수진은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선다. 


                         왜 이수진은 이곳에 다시 돌아온 것일까? 정말 나를 모르는 것일까?    



여러 남자 만나고 다니던...    옛날 친구의 말이 언뜻 떠오른다. 민서도 꾸벅 인사 뒤 뒤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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