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이 뜨기 전에 Mar 27. 2022

당신의 기억을 살 수 있나요?

6. 사랑의 기술

민서는 제대를 하고 나니 앞길이 더 막막했다. 미대를 다니겠다는 진로를 선택한 그 자체부터 흔들렸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다른 진로를 생각하기는 싫었다. 뭐든 하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민서는 학교 도서관에서 근로 장학생이 되었다. 전공 책만 봤던 민서는 여러 분야의 책에 관심이 생겼다. 처음 대학생이 되어서는 그냥 잘 몰랐는데, 진짜 사랑도 진짜 인생에 대해서 준비도 되지 못한 채 이십 대가 되어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제 다시 진짜 사랑도 진짜 인생도 미쳐 고민해볼 여유도 없이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 현실이 보였다.       


벌써부터 공무원 시험에 올 인 하는 친구들을 보니 마음이 다급 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민서는 한 발 짝만 멈추어보고 싶어졌다. 인생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방향도 잘 모르겠는데, 속도만 낼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민서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란 책을 들고 도서관 정문을 나서는데, 친구가 어느새 다가와 어깨를 치며 말한다.     


사랑의 기술? 류민서. 너는 플라톤적 이상적 사랑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다들 똑같아... 네가 가진 욕망은 없을 줄 알아? 그러니까 아직도 여자 친구 한 번 못 만든 거야! 그리고 전화를 그렇게 끊으면 다야?    


그래. 그래. 넌 네 여자 친구 하고나 잘 지내라. 나는 할 말 없으니 이만 간다.    


류민서 너 정말 이럴 거야? 나에게 뭐가 그리 화가 난 거야?      


왜 화가 났냐고? 네가 그렇게 물으니까 말하는 거야. 그래 나 이제껏 연애 한번 안 해봤어. 아니 못 한 거라고 해도 돼. 그래서 사랑이 뭔지도 잘 몰라. 그런 욕구도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야. 식욕처럼 있는 욕망이 부끄러운 것도 아니야. 난 너희들의 태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야. 사랑에 대해 그냥 마음이 닿는 대로! 감정의 가는 대로만 하는 책임 없는 그런 자세들. 그런 태도가 어쩔 수 없는 사랑이라고 믿는 네가 너무나 한심해! 사랑이 그런 거라면 나는 하나도 하고 싶지 않아. 상처를 주는 것도 사랑이라고 멋있게 치장하는 네가 너무나 마음에 안 들어! 알겠어?    


친구는 민서가 평소에도 좀 진지한 편이라 생각했지만, 대낮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오고 도서관 정문 앞 층계에서 한껏 소리 내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뭔가 많이 쌓인 건가? 생각했다. 그냥 이번에는 잠자코 지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사랑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기술에 대한 책이야. 책 좀 봐라. 이 책 잘 읽고 반납해! 내 이름으로 빌린 거니깐 꼭 반납해라. 잊어버리면 네가 책임져야 해..    


친구는 생각지도 못한 책을 들었다. 층계를 내려가는 민서의 뒷모습에 퉁퉁거리는 혼잣말을 하며, 살짝 한 장 넘겨보았다. 하지만, 고개를 내저으며 책을 덮는다.     


바로 앞, 무인 반납기에 그냥 그대로 넣어버렸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의 기억을 살 수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