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돈이 없으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으면 아이를 키우기 어렵다고 한다. 현실이 그렇다. 나도 그렇다.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없이' 컸기 때문에 잘 안다. 그 벗어나기 힘든 가난의 대물림을, 옷에 밴 냄새처럼 자주 맡는다.
어릴 때는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지 못하고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지 못해서 늘 기죽었다. 커서는 그 모든 것을 누리지 못한 내가 불쌍하고 자신이 없어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줄 것이 없는 내가 못나서 자주 작아진다.
하지만 가만히 가만히 생각하니,
지금 나는,
그때 그 시절 먹지 못했던 것, 갖지 못했던 것, 배우지 못했던 것, 누리지 못했던 것, 줄 게 없는 것이
여전히 먹고 싶고, 갖고 싶고, 배우고 싶고, 누리고 싶고, 주고 싶어 안달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들을 내가 진짜 갈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껍데기였다. 내가 진짜 목말랐던 것은 '빠진 사랑'이었다.
나는 사랑받는 것을 갈망했고 사랑받길 목말랐던 거였다. 사랑이 빠져서 상처가 되었고, 아픔이 되었고, 한이 되었다.
나는 공감할 수 없을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의 경우를 상상해 본다. 모든 것을 가졌고 그곳에 사랑까지 있다면 난 할 말이 없다. 아니 그런 가정과 사람들을 많이 보기도 한다. 완전 복이다. 축복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본다. 가진 것과 상관없이 목마른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예쁜 포장지 속 아무것도 품지 않은 빈 상자처럼 역시 '빠진 사랑' 때문에 괴로워한다.
나는 돈이 없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지만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이 부분에서 '그러면 애를 낳지 말아야지. 애들이 불쌍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틀린 말도 아니라 생각하지만, 나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 내 믿음을 하나님 기뻐하신다면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때때로 어렵지만 더 때때로 자족함을 느낀다. 매일 내려오는 만나로 인해 매일 신기하고 매일 감사하다.
나는 아이들로 인해 내 지난 시절 '빠진 사랑'이 메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기에 나의 아이들에게는 '가득 차는 사랑'을 주려고 매일 애쓰는 중이다. 나는 너무 부족해서 내 노력과 상관없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상처가 있을 것이고 자라면서 내게 아픈 말들을 쏟아낼 때도 있겠지. 그러면 나도 아프겠지만 다시 가득 차는 사랑으로 일어서야겠지. 때론 반성하고 사과하는 날도 있겠지.
그래도 분명한 건 내 아이들에게 '사랑이 없는 공급'을 주의하기로 한다. 물론 사랑이란 말로 빈 상자를 내미는 일도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환경은 모든 것이 넘쳐흐르는 세상이니 그 흐름 속에 물들어가지 않도록, 아무것도 품지 않은 빈 상자가 되지 않도록 자라게 할 것을 우선시하기로 한다.
(여기서 갑자기?)
셋째를 낳고 싶다는 마음을 두고 참 많이 꽤 오래 고민하였다. 남편과 나의 욕심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 부부 인생의 세 번째 아기를 온전히 기쁨으로 감당할 마음의 확신이 설 때 주시라고 기도했다. 그동안 안정되어 왔던 패턴들, 자리 잡은 일상들, 나의 비전들. 이런 것들이 다시 흔들릴까 봐 두렵기도 했다. 엎드려 기도하는 내게 하나님은 "아이를 낳는다고 모든 것이 멈출 거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그 아이는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일어나게 할 것이다. 시작되었다. 치유와 회복이 너의 삶에도 너의 가정에도."
그렇게 유복이가 왔다. 치유와 회복이라는 뜻이다.(줄여서 유. 복.)
기대가 크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있다. 나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랑하며 사는 사람 되고 싶다.
집 안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과 바깥에서 하는 일을 분리해서 생각하기 쉬운데 절대 그렇지 않더라. 둘 다 일이다. 나 다시 이 일을 시작하지만 또 설레고 감사하다. 힘든 길이 아니다. 복된 길이다. 나는 힘들어할 것이지만 또 행복할 것을 안다. 하나님은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내 진짜 친정 아빠니까. 그 아빠 믿고 또 새 길 가본다. 많은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