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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림 Apr 18. 2022

의지하다

여섯 번째 질문

초등학교 때 먼 곳에서 전학 온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와 저는 단짝이 되었어요. 통하는 게 많았기 때문이었죠.

우리는 책을 좋아했고 글 쓰는 걸 좋아했습니다. 점심시간이면 운동장을 뛰어놀던 친구들 사이에서 우리 둘은 대화를 나누며 운동장을 걸었습니다.


친구는 아주 어렸을 때 아빠가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당시 저의 아빠는 대장암으로 투병 중이었습니다. 같은 해에 10살 차이 나는 늦둥이 동생이 태어났고, 엄마는 동생을 업고 일을 나갔습니다.

저희 집은 너무 가난했고, 그 속에서 저는 외롭고 우울한 시간을 보냈죠.


아빠는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치료도 잘 받아서 건강을 회복했지만 금방 본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전과 같이 술도 먹고 담배도 폈고 욕도 했고 폭력도 일삼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친구에게 나의 아빠가 얼마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친구는 나를 위로했지만 어쩐지 친구의 눈빛은 쓸쓸해 보였습니다. 마치 '그런 아빠라도 있는 게 낫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죠.

어쩌면 친구를 바라보는 저의 눈빛 또한 '그래도 이런 아빠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린 서로 닮아있다 생각할 만큼 가깝다가도 아빠 이야기가 나올 때면 엷은 벽 하나만큼 거리를 느끼곤 했어요.


친구는 전교 1,2등을 하는 우등생이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글도 잘 쓰고 체육도 잘했습니다.

어느 날은 친구가 말했습니다.

자기가 이토록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는 엄마 때문이라고요.

홀로 자기와 언니를 키우고 있는 엄마에 대한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을 자주 내비치며, 엄마를 기쁘게 하는 것이 자기가 사는 이유라고 했습니다.


친구에게 삶의 원동력이 엄마였다면 저는 그 시절 교회 가는 것이 삶의 유일한 탈출구였고 위로였습니다. 일요일이면 빠짐없이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고, 학교 마치고 곧장 집으로 가기 싫은 날이면(아빠가 술을 먹고 있을 것 같다는 촉이 오는 날이면) 교회로 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신앙심이 깊어서라기 보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평일 텅 빈 예배당에 앉아있으면 마음이 편했습니다.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되고, 펑펑 못난 울음을 터트려도 괜찮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었으니까요.


친구는 그런 제게 말했습니다.

자기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요. 자기 자신 외에 다른 누군가를 믿는 건 나약한 것이라고요.

저는 그때 생각했죠.

'친구는 똑똑해서 신이 필요 없구나. 혼자 힘으로도 잘 살아갈 수 있다니 진짜 독하구나! 하지만 난 의지할 곳이 필요해. 그래서 하나님을 믿어.'


어른이 된 지금도 친구의 말이 가끔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친구의 말처럼 누군가를 의지한다는 것은 나약해 보이고, 나의 부족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일인 것도 같습니다.

사실 저도 그래요.

상처받을까 봐, 의심이 많아서, 강해 보이기 위해서 모든 것을 혼자 해내려고 발버둥 치거나 사람을 쉽게 믿지 않기도 합니다.

'여기까지만 좋아하는 거야. 너무 깊이 좋아하거나 믿으면 안 돼.'

'내 감정을 누가 다 이해하겠어? 굳이 다 이야기할 필요도 없고 알아주길 바라는 것도 욕심이야.'

'도움받지 않아도 돼. 혼자 해야 하는 거야.'




그런데 이 얄팍한 저의 노력들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결혼을 해서 나의 가정을 이루고, 나에게 모든 것을 의지한 채 자라 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말이죠.

오늘 아침 유치원 통학버스 창문에 비친 딸의 얼굴을 보면서도요.

내가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향해 두 손을 흔들고 머리 위로 하트를 그리는 저 아이의 사랑이 모든 것을 한순간에 덮어버립니다.

나약함도, 연약함도, 두려움도, 의심도 눈 녹듯 사라집니다.

아이만 저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인 저도 저 작고 작아이를 의지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주저앉은 저를 일으켜 세워 다시 걷게 하는 힘인 것을 보면 분명 의지의 대상이 맞습니다.


아이의 손을 잡는 것이 좋습니다. 작고 오동통한 손이 내 손안에 들어올 때 느끼는 따뜻함이요.

아이와 나란히 걷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의 시선 옆에 내 시선을 함께 두고 바라보는 세상의 새로움이요.

아이를 두 팔 가득 품에 안는 것이 좋습니다. 좁은 내 품에 다 담을 수 없는 소중한 존재를 안을 수 있다는 벅참이요.

이것이 의지입니다.

"다른 것에 마음을 기대어 도움을 받다" "의지하다"의 뜻이랍니다.

내가 아닌 '너'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것으로 ''가 도움을 받는 것. 이렇게 내어준 마음들이 상처받지 않고 도움을 받을 때 또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건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겠지요.


어떻게 그렇게 혼자 다 해내려 하며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친구는 신을 믿는 것, 누군가를 의지하는 것은 나약하다고 했지만 엄마를 위해 공부했던 친구도 알고 보면 의지의 힘 때문에 그 시절을 지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기를 의지하는 엄마에게 어쩌면 어린아이 같이 기대고 싶었던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요.


외로움과 나약함 속에 머리가 아픈 날들을 보내며 썼다  지웠다 반복한 글을 오늘에서야 완성했습니다.

글처럼 살아내지 못하는 것이 괴로워 글 쓰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자 아픈 순간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남겨봅니다.

그리고 오늘도 질문해봅니다.


여섯 번째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누구를 의지하며 사나요?

누가 당신을 의지하고 있나요?

이 글을 읽는 순간만큼은 제 글에 기대어 잠시라도 도움을 받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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