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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림 Jun 10. 2022

보라색 장화

사랑

어제는 유치원 학부모 참여수업이 있었다.

유치원 바로 앞에 바다가 있어, 아이와 함께 바다정화활동도 하고 갯벌 생물도 찾아보는 갯벌 체험을 했다.


갯벌 체험을 위해 아주 오랜만에 장화를 꺼냈다.

선물 받은 지 거의 10년이 다 된 장화인데도 아직 반질반질하고 깨끗했다.

처음에는 아끼느라 자주 신지 않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장화를 신고 밖에 나갈 일이 많지 않아서인 것 같다.

이사 다닐 때마다 고이 모시고 다니긴 했지만 신발장 밖으로 좀처럼 나오지 못했던 '보라색 장화'가 드디어 바깥으로 나왔다.


질퍽질퍽  발이 빠지는 갯벌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장화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사람이 생각났다.

모래 구멍을 비집고 쏙 올라오는 맛조개처럼 떠오르는 얼굴!

장화를 선물해준 언니가 보고 싶어졌다.

그러다 갑자기, 장화를 선물 받던 그날의 기분이 고스란히 내 마음을 채우고 언니가 했던 이 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언니와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구름이 뒤덮은 하늘 아래를 걸을 때에 차분해지는 쓸쓸함을 좋아했다.

어느 비 오는 날. 언니는 장화를 신고 나는 운동화를 신고 물웅덩이를 지날 때였다. 

언니는 어린아이처럼 첨벙첨벙 물을 그대로 밟으며 걸었고 나는 웅덩이를 비켜 걸었다. 

나는 그때 속으로 언니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물을 그대로 밟고 지나가도 괜찮은 저 튼튼하고 광나는, 비싼 브랜드 장화를 신은 언니가 부러웠다.


시간이 흘러 비가 오지 않는 어느 맑은 날.

언니가 내게 커다란 상자를 건네며 말했다.

"니도 비 오는 날 좋아하잖아. 이거 신고 마음껏 물 밟으면서 걸으라고 샀어. 검은색 살까 하다가 왠지 너랑 보라색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며칠 후 보라색 장화를 신고 언니 앞에 나타났던 날.

목젖이 다 보일 정도로 크게 웃으며 "수산시장  가나?"라고 놀리던 언니.

언니가 신었을 땐 분명 멋스러웠던 긴 장화가 다리 짧은 나를 만나 수산시장 스타일로 바뀐 게 스스로도 웃겨 한참을 웃었던 날.

그날이, 그날의 우리가 몹시 그리워졌다.


내 필요보다 누군가의 필요에 좀 더 민감한 사람.

내게 좋은 것을 누군가에게도 주고 싶은 벅찬 마음.

그저 아무 이유 없이 내게 주어진 햇살과 비가 고마워서 나도 그렇게 내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랑.

언니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었고, 그렇게 나를 사랑해줬다.


내가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비가 오는 날에도 피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사실 장화 때문이 아니었다.

내 삶 위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비가 쏟아질 때 곁에서 함께 맞아주었던 사람들, 반드시 물웅덩이를 지나가야만 하는 때에도 돌아가거나 피하지 않고 함께 건너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보라색 장화'를 물려줘야 한다.

'사랑'은 물웅덩이처럼 고여있지 않고 흘러가야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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