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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림 Oct 17. 2022

도시락


내일 어린이집에서 키즈카페에 가는 혜리의 도시락을 싸야 해서 이 밤중에 도시락 재료를 미리 다듬어놓았다. 오늘은 애들을 재우는데만 한 시간 반을 보냈고, 이미 지친 몸을 이끌고 나온 거실은 약 올리듯 정신없이 어질러져있다. 그냥 눈 딱 감고 자고 싶은 마음, 다 내팽개치고 내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을 붙잡고 도시락을 준비하면서 처음에는 긴 한숨이 났다.


지긋지긋한 일상. 하루 종일 어떻게 이리도 할 일이 많은지, 해도 해도 집안일은 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막중한 책임감과 무거움도 날로 커져만 간다. 크게 보람되지도 않고 인정받는 일도 아닌데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다. 때론 감사하고 기쁘지만 또, 때론 불평이 나오고 힘이 든다. 그런데, 내일 도시락을 맛있게 먹을 혜리를 상상하며 야채를 다지다 보니 스쳐 지나간 사랑들이 떠올랐다.


내 소풍 전날 밤마다 이렇게 부엌에서 한참을 서있었을 우리 엄마, 손주들 주려고 맛난 음식을 만들어놓고 기다린 시어머니가 홀로 보냈을 주방에서의 시간들, 나와 아이들이 곤히 자는 밤중에도 가장의 무게를 지고  당직 근무를 서는 남편, 아파트 분리수거장과 음식물 쓰레기통이 날마다 깨끗이 비워지는 것, 해와 달이 아침마다 밤마다 뜨는 것까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는 어제의 누군가가 끝까지 지키고 희생한 사랑이 깃들어있다. 아침이 되면 내 노력과 열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라도 그렇게 매일 자신의 자리에서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지켜나가고 있다. 나의 피곤함과 연약함도 야채처럼 곱게 곱게 다졌다. 한숨이 호흡이 되어 지쳤던 마음이 평안으로 바뀌는 순간은, 늘 값없이 사랑할 때뿐임을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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