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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림 Oct 21. 2022

참는 걸 잘합니다.


누군가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는 참는 걸 참 잘하는 것 같아."

그 말을 들을 당시 나는 폭풍우 속에 있을 때였다. 적어도 나와 같은 나이에, 나와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 중에서 내가 제일 괴로울 것이라 생각하던 때였다. 그런 나에게 참는 걸 잘한다는 그 말은 영 찝찝한 말이었다. 다른 건 다 못하고 별 볼 일 없는데 그나마 참는 걸 잘한다는 말인지, 힘든 상황을 잘 이겨내고 있다는 말인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오래오래 기억나는 말이었다.


나와 같은 나이에, 나와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 중에 그저 나는 작고 작은 한 사람일 뿐이라 생각하는 요즈음은 참는 걸 잘한다는 그 말이 부쩍 마음에 든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참으며 자랐고, 사랑하지만 끝없는 인내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만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읽고 있는 책 속의 한 단어가 눈에 띄었다.

지구력.

오랫동안 버티며 견디는 힘을 말한다.

나는 잘 참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고 지긋지긋한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끝없는 길을 걷고 또 걸을 때, 그런 나를 지켜보는 세상은 비웃듯 빠르게 달리는 차들 같았다.


지나가는 거리의 간판도 훅훅 바뀌고 친구의 직업도 애인도 바뀌어 있는 소식에 흠칫 놀랄 때가 있는데, 문득 초등학생 때부터 입던 나의 주황색 반바지가 떠오른다. 남편은 반바지를 꺼내 입는 여름철마다 그 바지가 아직도 살아있는 것에 놀라며 버리라고 놀려대지만 그럴수록 내가 사랑하는 주황색 반바지는 갈수록 편하기만 하다.


나를 둘러싼 세상은 새로워져만 가지만 내가 잘하는 일,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은 잘 참는 일, 지구력을 요하는 일이다. 육아도, 가정을 지키는 일도, 글을 쓰는 일도, 작가가 되어 독자를 만나 소통하는 꿈을 꾸는 일도, 아빠와의 관계도 오랫동안 버티며 견디는 힘이 필요한 일이다. 나의 주황색 반바지처럼 오랫동안 살아남아 갈수록 편해지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잘 참는 사람이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참고 참았던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만나지 못했을 거다. 나는 내 가정과 남편, 아이들을 사랑한다. 책을 사랑하고 내 글을 사랑한다. 사랑하기까지 반드시 참아내는 시간들은 필요하다. 나는 참는 걸 잘한다. 그런 내가 좋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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