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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림 Nov 17. 2022

거울


아이들의 지문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거울을 닦았다. 유리 세정제를 칙칙 뿌려 얼룩을 닦아내는데 어느 순간 내 얼굴에 초점이 맞춰졌다. 유리에 묻은 얼룩에만 집중하다가 거울에 비친 내 얼굴로 시선이 멈춘 것이다. 깨소금 팍팍 친 듯 양쪽 광대에 골고루 박힌 주근깨와 피곤한 두 눈을 하고 있는 나를 마주 봤다. 바보 같은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입은 웃지 않고 있는 나를 보며 생각했다.

'거울에 묻은 더러운 얼룩에만 집중하다가 어느 순간 내 얼굴을 마주한 것처럼 다른 누군가의 연약함을 볼 때그 속에서 나를 보기도 하는구나. 다른 사람의 실수와 잘못은 그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있는 모습 아닌가. 그러니 너무 비난하지도, 주눅 들지도 말라고 거울을 보고 사나 보다.'






카페에서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들의 수다를 엿들은 적이 있다. 아이를 키우는 이야기, 몸조리할 때 시어머니가 불편했다는 이야기, 눈치 없는 남편 때문에 곤란했다는 이야기, 몇 푼 벌려고 일할 바야 그냥 집에서 아이나 키우는 게 낫다는 이야기, 설거지하는 게 너무 싫어서 한 캔을 쭉 들이키고 나서야 설거지를 한다는 이야기.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한쪽 귀로 듣고  마음속으로 가지고 오면서 서글픈 웃음이 났다. 웃음이 난 것은 공감이 가서이고, 서글픈 것은 여자이자 엄마로서 공감이 가서였다. 아마 아이를 낳기 전의 나였다면 육아 스트레스가 가득한 아줌마들의 한낱 불필요한 수다 정도라며 한쪽 귀를 막고 마음을 닫았을 거다.


세상이 다 나를 보는 것만 같았던 학창 시절에는 거울을 참 많이도 들여다봤던 거 같다. 거울 속의 나를 보고 주로 한숨만 내쉬었으면서 왜 그리도 자주 봤을까. 여기저기 못난 구석 투성이인 외모에도, 쉽게 바뀌지 않는 내 모습을 스스로 미워하면서도 어쩌면 그건 나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타인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던 이기심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이제 거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닦는 기분으로 산다.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특히, 뿌연 안개 같은 삶의 모습 속에서 결국엔 나를 보고 만다. 놀이터에 갈 때마다 항상 혼자 노는 포니테일 머리를 한 여자 아이를 봤을 때도, 거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꼭 같은 시간에 담배 한 대를 피고 돌아가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봤을 때도, 유치원 학부모 참여수업에서 본 장애 아동 엄마의 마스크 속 작은 한숨 소리를 들었을 때도, 외국인 이웃 여성이 자기도 일을 하고 싶다는 말을 내게 했을 때도 나는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거울을 닦을 때처럼.


세상을 살아갈수록 우리는 저마다 다른 삶의 모습을 보며 외롭다가도 한 발만 가까이 나아가면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걸 알게 되고 안심한다. 그러니 그들을 너무 비난하고 미워할 필요도, 주어진 내 삶 앞에서 너무 기죽을 필요도 없다. 거울을 보면서 오늘도 나를 보고, 나 같은 너를 보고 싱긋 웃어 보이면 그만이다. 좀 많이 얼룩졌다면 수건 하나 들고서 닦아주면 된다. 나부터 깨끗하게 단장하고 나선다면 나를 보는 누군가도 거울처럼 빛나지 않겠는가. 얼룩을 피하지 않는 그러나 밝게 볼 수 있도록 비추이는 거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손자국이 그대로 남은 거울을 닦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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