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규림 Dec 13. 2022

쌀국수가 생각날 때면


밤이 되고 아침이 오는 것. 그것이 두려운 때가 있었다. 시간이 째깍째깍 흘러가는 일분일초가 두려워 마음이 터질 것 같았다. 실제로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 이러다 정말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상시엔 아무것도 아니었던 숨을 쉬는 일과 걷는 일까지 고통스러웠다. 눈을 감아도 답답하고, 눈을 떠도 답답했다. 밤이면 이대로 흔적 없이 사라져서 아침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노라고, 아침이면 밤이 될 때까지 이 긴 시간을 또 어떻게 버틸 것인지 벌벌 떨었다. 사람을 만나면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할까 봐 두려웠고, 혼자 있으면 죽을 것만 같아서 무작정 누군가를 만나야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가족들은 갑자기 이상해진? 나를 그야말로 이상하게 받아들였다. 내가 무슨 일을 당했거나 큰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조차 그것이 공황장애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건 그 긴 터널을 빠져나갈 때쯤이었다.

가족과 친구들.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오히려 나의 상태를 밝히는 것이 어려웠다. 최대한 숨기고 싶었다. 그들의 걱정을 보는 것 또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가정 안에 있을 때 나는 보이지 않는 불안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드는 느낌을 받았다. 공황장애는 불안 증상이다. 이 불안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아주 어릴 때부터 조금씩 자라나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려 내 몸과 마음까지 바꿔놓았다는 걸 깨달았다. 영영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가정과 환경의 틀 안에서는 치유받을 수 없다고 직감했던 것 같다.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안아준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이들이었다. 그렇게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사람들. 일요일 교회에 가면 만나던 언니들과 간사님. 그들은 불안한 나를, 이상한 나를 아무렇지 않게 평소와 같이 대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 가게를 뛰쳐나왔을 때, 교회 최 씨 언니는 당장 달려와 동동거리는 나를 안아줬다. 수업을 마치고도 집에 가지 못한 채 갈 곳 없이 방황하는 나를 만나주었던 오 씨 언니. 언니들은 나를 데리고 바닷가를 걸었다. 대학로에서 쌀국수 가게를 하는 간사님을 찾아서는, 언니들과 함께 쌀국수를 먹고 이야기도 나눴다. 간사님이 직접 만든 국물이 곧 넘치기 직전이었던 양 많은 쌀국수. 진한 육수에서 기분 좋은 레몬향이 나던 쌀국수. 쫄깃한 쌀국수면이 하루 종일 굶은 내 목구멍 속으로 빠르게 넘어갈 때면 우울하고 아팠던 내가 민망하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그 어디서도 맛보지 못한 맛이다. 눈물이 핑 도는 맛. 제대로 된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도 없었는데 나는 점점 괜찮아지고 있었다. 언니들과 간사님의 사랑이 들어있었던 쌀국수는 음식이 아니라 약이었으리라.

이른 새벽에도, 늦은 밤에도 언니들은 기꺼이 나를 만나줬고 같이 있어줬다. 그리고 괜찮아질 거라고 다독여줬다. 그들은 바쁜 직장인이라 남는 시간에 쉬고 싶었을 텐데 나에게 시간과 마음을 내어주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나는 바로 언니들을 떠올렸고, 동시에 쌀국수가 먹고 싶어졌다. 지금은 가게를 접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을 따뜻하게 먹이고 계실 간사님도 보고 싶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던 어둔 터널 속 그때의 나를 떠올린다. 한편 가끔 두려운 순간이 찾아와도 이제 나는 ‘괜찮아. 곧 지나갈 거야. 그냥 이대로도 괜찮아. 잠시 아픈 거야’하고 이겨낼 작은 힘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나처럼 쌀국수 한 그릇 필요한 이들 볼 때 외면하지 않고 뜨끈한 사랑 나누는 사람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나의 선한 사마리아인은 쌀국수 같은 분들이었다. 따뜻하고 든든한 사랑. 그 사랑을 준 분들을 기억하는 계절이다.

-아름다운 동행 감사 이야기 공모전 버금상 수상글

작가의 이전글 거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