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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아 Nov 19. 2021

길을 잃다

- 해파랑길 5코스 - 길을 잃었을 땐 멈춰야 한다 

   


   해파랑길 5코스는 간절곶 북쪽 진하해변에서 시작해 회야강을 따라 울주 덕하역까지 걷는 17.6km의 길이다. 난이도는 별 두 개로 쉬운 편이다. 우린 울산 시내에 숙소를 잡아 놓고 있어 덕하역에서 출발해 진하해변으로 걷기로 했다. 원래 코스대로라면 빨간색 이정표를 따라가야 하지만, 우린 거꾸로 걷고 있어 파란색 이정표를 따라갔다. 방향이 헷갈릴만한 곳엔 화살표와 리본, 팻말 이정표가 촘촘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친절한 이정표 덕분에 길을 잃거나 헤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엔 한 번도 헤맨 적이 없네. 여름에 부산 구간 걸을 땐 이정표 놓쳐서 날마다 한두 시간씩 더 걸었잖아.”

  “그러게. 코스 바꾼 것도 정말 잘한 것 같아. 이렇게 비가 오는데 오늘 산길을 걸었다면 당신은 정말 힘들었을 거야.”


  남편과 난 매끄럽게 흘러간 이틀 동안의 걷기를 돌아보며 단조롭게 이어지는 시골길을 걷고 있었다. 덕하역에서 시작한 5코스는 대로변을 따라 걸어야 해 지루했다. 5코스는 대부분이 강을 따라 걷는 길이라서 ‘강파랑길’이란 별칭까지 있다는데 강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진하해변에서 시작했다면 처음부터 강을 따라 걸었겠지만, 덕하역에서 역방향으로 걷고 있던 우린 한 시간 넘게 도로변 길을 걷고 나서야 회야강 언저리에 닿을 수 있었다.      

비 내리는 회야강변길


  강변길에 들어서자 마음이 느긋해지며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가 모래톱엔 왜가리와 백로가 목을 늘이고 있었다. 우린 길가 정자에 앉아 쉬면서 물과 간식을 먹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십 분쯤 강변 둑길을 따라 걸었을 때 공중화장실이 나왔다.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가 나왔는데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먼저 출발했나 싶어 남편을 따라잡으려 빠른 걸음으로 뒤쫓아갔지만 남편도, 앞서 걸어가던 다른 팀의 세 남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눈앞에서 사라질 만큼 멀리 갔나 의구심이 들었지만, 평소 남편 걸음이 워낙 빨라 멀리 갔나 보다 생각하고 뛰다시피 걸었다.      


  숨을 헐떡이며 걷고 있는데 왼쪽에 정자가 보였다. 발이 아파 쉬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남편이 어디쯤 가고 있는지 전화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남편은 지금 어디냐며 둑길 말고, 둑 아래 하천 옆길로 내려오라고 했다. 그런데 둑길 아래쪽은 갈대밭만 무성할 뿐 길은 보이지 않았다. 남편은 골프연습장 근처 다리 옆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멀리 앞쪽에 다리는 보이는데 골프연습장은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 저렇게 멀리까지는 갈 수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다리까지 가보기로 했다. 다리 건너편 어디에 골프연습장과 하천 옆길이 있겠지 생각하며 속도를 냈다.     


  다리에 도착해서야 뭔가 잘못되었단 생각이 들었다. 다리 주변을 살펴보니 불과 몇십 분 전에 내가 지나쳐온 다리였다. 대로변 길을 벗어나 드디어 강이 나왔다며 반가워했던 곳이었다. 화장실을 나와 정신없이 뛰어온 길이 이미 내가 걸어왔던 곳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잠깐 쉬어갈까 했던 정자는 좀 전에 남편과 간식을 먹으며 쉬었던 곳이었다. 이십 분 동안 같은 길을 되짚어 오면서 왼편에 있어야 할 강이 오른편에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반대편으로 가면서 날 기다리지 않고 먼저 가버린 남편만 원망하며 구시렁거린 게 어이가 없었다.     


  발가락 물집과 복사뼈가 갈라지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뛰고, 걸었는데 온 길을 되짚어간 것을 깨닫고는 다리가 풀렸다. 기운이 쑥 빠지며 허탈해졌다. 사십 분 사이 내게 일어난 일이 믿기지 않았다. 길도 하나, 강물도 한줄기인데 거기서 길을 잃고 헤맸다는 사실이 마치 뭔가에 홀린 것만 같았다. 전에도 방향감각을 잃고 같은 장소에서 출구를 찾지 못해 몇 바퀴씩 돌았던 경험이 떠올랐다. 알츠하이머 최초 증상이 기억력 문제가 아니라 방향감각 이상이라는 얘기가 떠오르며 막연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공중화장실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와 보니, 하천 쪽으로 난 계단 옆에 파란색 이정표가 있었다. 처음 화장실을 나왔을 때 왼쪽으로 고개를 한 번만 돌렸어도 같은 길을 세 번이나 걷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천 바로 옆엔 남편이 얘기했던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고, 저만치 앞쪽엔 초록색 그물의 골프연습장과 다리가 있었다. 절뚝이는 걸음으로 강가를 걸으며 강물을 바라보았다. 한바탕 소용돌이가 휩쓸고 간 마음을 잔잔히 흐르는 강물에 흘려보냈다. 남편은 잠수교 근처 정자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헤매는 바람에 남편은 정자 주변을 오가며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내 눈을 가리고 헤매게 한 원인이 뭘까 생각했다. 마음속 완주 욕심이었다. 첫날 15km, 둘째 날 20㎞를 걷고 난 뒤라 발 상태가 엉망이었지만, 난이도 별 두 개짜리 길이니 조금만 힘내서 걸으면 5코스도 완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녁 일정 때문에 늦어도 세시 전까지는 진하해변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도 한몫했다. 촉박한 일정과 완주 욕심이 내 눈을 가렸다. 눈앞에 있는 것을 못 보게 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걷고 있는 걸 의심하지도 깨닫지도 못 하게 했다. 이번 걷기에선 헤매지 않았다며 뿌듯해하며 했던 말이 무색하게도 가장 쉽고, 단조로운 길에서 가장 어이없게 길을 잃었다.      '


  길을 잃고 완주를 포기했던 해파랑길 5코스는 무엇인가에 마음을 빼앗겼을 때 다른 모든 것이 얼마나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지 깨닫게 해 줬다. 회야강 변 길에서 길을 잃은 것은 멈춤의 신호였다. 강가 코스모스와 피라칸사스 붉은 열매에 눈길을 주고, 강물 위에 내리는 빗방울이 어떻게 강물과 하나가 되어 흘러가는지 들여다보라는 신호로 여겨졌다. 삶의 여정에서도 길을 잃으면 우선 멈춰야 한다. 두려움 속에서 자신을 직면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왜 거기 서 있는지 돌아보고 다시 나아갈 방향을 찾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길을 잃는다는 것은 곧 멈춤이고, 새로운 길 찾기의 시작인 것 같다.    


* 해파랑길 5코스 : 진하해변 - 덕신대고 - 청향운동장 - 덕하역(17.6km) 

* 걸은 날 : 2021.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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